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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법정에 선 ‘밀실 고문’…재판부는 ‘증거 보전’ 기각

등록 :2009-12-2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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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된 계기는 1985년 하반기에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하면서부터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문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된 계기는 1985년 하반기에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하면서부터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생 공산주의자’ 만들려 23일간 고문
김근태 부인 인재근 폭로로 첫 공론화
교도관은 증거 탈취…법원은 기일 연기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2. 김근태 고문사건과 사법부 (1)

고문 문제의 공론화

한국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고문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된 계기는 1985년 하반기에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이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하면서부터였다. 이어 1986년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했고, 1987년 벽두에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고문은 군사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요긴한 방편이었지만, 군사독재의 몰락을 재촉한 독배였다.

1985년 10월 29일 전두환 정권은 대학가의 각종 시위와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 학생들의 지하단체인 ‘민주화추진위원회’가 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인 문용식의 배후에 김근태가 있다면서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정권의 앵무새였던 언론은 ‘남파’보다 무서운 ‘자생’ 공산주의자라며 김근태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지면을 할애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거센 도전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재야에서 선도적으로 투쟁해온 민청련과 학생운동을 하나로 묶어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했다.

1985년 9월 4일은 2년간 민청련 의장으로 있으면서 7번째 구류를 살던 김근태가 석방되는 날이었다. 비 내리던 이날 새벽 김근태는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는 대신, 남영동의 악명 높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이곳에서 김근태는 9월 25일까지 23일간 불법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은 김근태의 문집 <남영동>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김근태 역시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김근태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했지만, 고문자들은 “그건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완전한 항복을 요구했다. 김근태는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는 저들의 요구에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과 자주 만났다는 황당한 소설을 사실이라고 시인해야 했다.

기적 같은 1분

자신이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한 것은 김근태가 처음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법정에서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들의 호소는 대개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이일규 대법원판사처럼 아주 드물게 그런 호소에 귀 기울인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이런 호소를 무시했고, 언론은 단 한 줄도 이들의 이야기를 써주지 않았다. 김근태를 재판한 판사들도 그의 호소를 무시하긴 마찬가지였고, 제도권 언론 역시 김근태의 고문 폭로를 외면했다.


그런데도 고문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김근태의 폭로에는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인재근이라는 동지이자 아내가 있었다. 인재근은 구류에서 석방되었어야 할 남편이 사라지자 여기저기 수사기관을 쫓아다녔다. 아무도 남편의 행방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디서 조사받든 이런 사건에 걸려든 사람들은 결국 검찰에 송치되게 되어 있었다. 기약 없이 며칠을 기다린 끝에 인재근은 9월 26일 검찰청사 9층 승강기 앞에서 기적적으로 남편과 마주쳤다. 김근태는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자신이 당한 처참한 고문의 내용을 이야기했고, 발과 팔꿈치의 상처와 발등에 시꺼멓게 남아있는 전기고문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남편의 증언을 가슴에 새긴 인재근은 민청련 명의로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라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이 사실을 널리 알렸다. 언론은 침묵했지만,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따로 놀던 재야와 정치권이 하나로 묶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구체성의 힘

김근태의 폭로는 대단히 구체적이었다. 김근태는 23일 동안 그가 당했던 고문 내용과 일시, 고문한 사람의 실명과 대공분실에서 통하는 별명, 생김새, 저들이 고문을 통해 조작하려고 했던 내용, 고문 당시의 정황 등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필자도 고문 피해자를 여럿 만나 보았지만, 이런 세세한 내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발은 절실했지만 모호했다. 조금만 구체적인 상황으로 들어가면 “그걸 어떻게 말로 다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김근태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고, 조서에 날인할 때 얼른 사법경찰관 아무개라고 쓰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고문을 당해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고문자들이 자기들끼리 시집간 딸 잘사는지, 체력장 친 아들놈은 잘 쳤는지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정황을 기억해두었다. 얼마나 많은 고문 폭로가 얼마나 덧없이 사라졌는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치 떨리는 분노와 굴욕감을 삭이며 필사적으로 세세한 사실들을 기억해두었다.

또 김근태는 고문의 증거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없는 밀실에서 자행된 고문에는 어떤 증거도 목격자도 있을 수 없다. 고문피해를 호소했을 경우 많은 판사들이 증거가 없다며 외면했던 사실을 김근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전기고문을 당할 때, 김근태는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쳤고, 담요를 깔아두었음에도 그의 발뒤꿈치는 짓이겨져 야구공만한 딱지가 남았다고 한다. 구치소로 옮겨진 뒤, 딱지가 떨어졌는데 김근태는 그걸 휴지로 싸서 잘 보관했다. 공판 일주일 전에야 처음으로 변호사를 접견하게 된 김근태는 이돈명 변호사 등에게 그 딱지를 보여주며 증거로 제출할 것을 요청했으나, 교도관이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감방으로 돌아온 뒤 교도관들은 김근태로부터 딱지를 강제로 탈취해 가버렸다.

안기부, ‘강력수사’ 방침 제시

김근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안기부와 무관한 사건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안기부는 ‘안보수사 조정권’을 휘두르며 주요 공안사건들을 사실상 진두지휘했고,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이 사건에서도 처음 김근태 등 민청련 간부들을 연행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부터 세세한 공판 대책에 이르기까지 안기부의 입김은 구석구석 미치고 있었다.

김근태, 이을호, 김병곤 등 민청련 간부들이 연행되고 5일 후인 1985년 9월 9일, 안기부가 작성한 <학원 소요 배후 조직 ‘서울대 민추위’ 등 수사 진행상황 보고>라는 보고서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사와 관련해, 안기부가 어떻게 조정권을 행사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먼저 이 사건 수사에서 “당부는 수사관 상주, 수사 조정 및 각종 자료 지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명시하면서, 수사 처리 방향으로 “금번 수사를 계기로 민청련 조직 자체를 최소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이상 수준으로 의율, 조직 와해”시키고,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 강력수사로 사건 실체 전모 규명”을 한다고 제시했다. 또 안기부는 “관련자 전원 법정 중형으로 엄단”하여 이들을 “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차단”하고, “수사종료 후 적기에 사건 전모 홍보로 학원 소요 배후실상 폭로”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렇듯 안기부는 수사 초기부터 이 사건의 확실한 처리 방향을 세워두었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수사관들이 상주하면서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사를 사실상 지휘했고, “다소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강력수사”를 하도록 부추겼다. 고문을 하지 말라고 해도 일선에서 고문이 자행되는 판에 ‘강력수사’를 하라거나 ‘엄문’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사관들은 없었다.

안기부 압력으로 증거보전 신청 기각

재야의 신망을 받고 있던 김근태가 끔찍하게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인권변호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10월 2일 변호인단은 김근태의 상처에 대해 ‘신체 감정 증거보전’을 청구했다. 안기부는 고문의 상처가 남아 있을 경우 변호인 접견이나 가족의 면회를 금지하여 고문의 흔적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주로 써왔는데, 뜻밖에 검찰청 복도에서 인재근이 김근태를 봐버리는 바람에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안기부로서는 고문 문제를 덮기 위해서 증거보전 신청을 기각시켜야만 했다. 안기부의 <학원 및 노조 배후 조직 민청련 수사 진행상황 보고>(1985년 10월)에는 안기부가 담당 재판부를 ‘강력 조정’하여 이 신청을 기각시킨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안기부는 “사전 물의야기 예방 차원에서 법원(김오수 판사)을 강력 조정”하여 “10.12 김근태에 대한 증거보전 필요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구 기각결정 처리”토록 하였다.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보고서의 ‘처리상황’ 항목에는 증거보전 신청을 둘러싼 움직임이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0월 2일 “증거보전(신체검증 및 감정) 신청”이 제기되자, 담당 재판부는 10월 4일 “변호인에게 증거보전 목적 소명 요구”를 했다. 다음날 변호인들은 “담당 재판부에 검증 기일 조속 지정”을 요구했고, 담당 재판부는 10월 8일 “검증실시 검토”를 했다.

10월 10일 담당재판부가 “국립의료원으로부터 감정인(정형외과 부과장 조○○) 추천 회보서”를 받은 것으로 볼 때 재판부는 증거보전 신청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국립의료원 쪽에 감정인 추천을 의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0월 11일 재판부는 돌연 “감정절차 진행 연기 결정 및 경찰 김근태 조사기록 검토”를 했고, 다음날인 12일 “증거보전 필요성 불인정, 기각 결정”을 내렸다. <조선일보>는 김오수 판사가 “김 피고인이 검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고문 여부로 증거능력을 다툴 진술 내용이 없어 증거보전 절차에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이 신청을 기각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의 ‘강력 조정’은 역시 잘 먹혀들어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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