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⑤ 아리랑의 땅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털어놓는다.

1991년, 피비린내 나는 봄의 끝자락에 중도하차한 대하드라마 <땅>의 김기팔 작가는 ‘술’에 빠져 있고, 연출자인 나는 누군가의 힘에 밀려 한국 땅에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칸 영화제 탐방 명령이 떨어지더니, 귀국 3일 뒤에는 베를린 경유 엘에이(LA) 필름마켓 출장 명령과 비행기 티켓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중도하차에 따른 후유증 차단책으로 ‘외부인사 접촉 금지’를 하려는 반강제 유형이었다. 기자 접촉 금지가 첫째 이유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3개월간 세계 유수의 문화계와 영화계를 살펴보았다. 최상의 문화체험이었다. 그러나 행적을 옮기는 내내 가슴은 먹먹했다.

작가는 석달 열흘 하루도 빼지 않고 술을 마시는 동안, 연출자는 ‘땅’의 영혼을 안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미국을 거쳐 중국을 두 번 다녀왔다. 그런 유형 시절에 ‘땅’의 영감은 신기루를 만나듯 ‘김산’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에 들어가고, 그들의 대동아공영권이 동남아를 짓누르고 있던 시대, 김산 같은 존재들이 통곡하던 그 시절이 동일시되어 밀착되었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출발한 평북 용천 출신 장지락(김산)은 중국 중산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교원 생활을 하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소비에트지구 대표가 된다. 그때 마오쩌둥을 만나며 그의 기상은 하늘을 찔렀다. 그 장지락을 그린 한 권의 소설을 만났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다. 1984년 국내 첫 출판 때 판금 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읽어 볼 사람은 다 읽어본 ‘지하 베스트셀러’였다.

곧장 김기팔 작가를 만났다. ‘아리랑을 24부작 미니시리즈로 기획하자.’ 취중의 김 작가는 술이 확 깬다며 적극 찬동했다. ‘땅’의 여한을 풀고 싶으리라. 동산리(고양시 신도동) 김 작가의 집에서 밤늦도록 숙의를 마치고 나서는 시골길은 어둡지만 상쾌했다. 풀섶에서 소변을 보다 하늘을 보니 별들이 영롱했다. 은하수를 온 하늘에 뿌려 놓은 듯, 만주벌에서 단재 신채호가 얘기한 꿈하늘 같았다. 김산과 함께 꿈하늘을 그려 보고 싶었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도 여러번 하늘을 우러러 불렀다고 했다. “하늘이여 이래도 됩니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자가 호의호식하다가 종생하고, 제 한몸 던져 만인을 이롭게 하려는 자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도무지 하늘이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차마 내버려 두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그리고 지천으로 역사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한편 마음대로 못 만드는 이 나라를 꿈하늘로 바꾸고 싶은 상상력이 발동하자 그날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중국 촬영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 연전에 <백범일지> 제작 때 중국 촬영 경험과 중국의 변화 속도를 고려하여 <중국중앙방송>(CCTV)을 찾았다. 합작 파트너는 시시티브이 국제부장,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와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를 성사시켰던 인물이다. 그도 우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한국과 중국의 현대사가 교차하는 핵심 주제이다. 김산은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가해, 상위 서열로 조선의 지분을 행사하다가, 트로츠키 분자로 지목되어 숙청된 인물이다. 이국 땅에서 죽어간 한 조선인의 생애만 들춰봐도, 어떻게 이런 삶을 산 사람이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가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스멀거리며 돋아난다. 역사의 미아가 될 뻔했으나 미국의 여성 언론인 님 웨일스를 만나 자신의 인생 역정을 토로한 책 <아리랑> 덕분에 기적적으로 역사에 남는다. 짧았으나 깊은 흔적을 역사에 남긴 김산, 그리고 그 대화를 나눈 지 1년 만에 역사 속에 생매장됐던 김산은 중국 홍군에 의해 총살됐는데, 그 정확한 기일은 누구도 모른다. 단지 중국 공산당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캉성이 1938년 10월19일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간첩이니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확인될 뿐이다. 뒷날 복권까지의 투쟁사가 드라마틱하다는 데 <문화방송>(MBC)과 시시티브이가 공감했고, 원작·극본·연출·제작은 한국 쪽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곧 원작자 님 웨일스를 찾아내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워싱턴 근교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사는 님 웨일스는 우리 방문을 크게 환영했다. 칠순 고령에도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노력이 놀라웠다. 현관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거실에 들어서니, 큰 창을 등지고 암체어에 앉아 있는 그의 어깨 위로 부드러운 역광이 내려앉아 있었다. 품위있게 예뻤다. 사실 님 웨일스의 미모는 ‘세기의 스캔들’을 뿌렸었다. 마오쩌둥이 가장 신뢰했던 외국인 에드거 스노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님 웨일스는 김산의 <아리랑>을 끊임없이 되살려 내려고 애썼다. 작품의 향기보다 더 짙은 건 ‘김산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그의 글에서 감지되었던 이성적인 사랑의 감정이 몇십년이 지난 그때 그 순간에도 느껴졌다. 감동이었다.

“솜이 든 푸른색 커튼을 학자의 손처럼 야윈 손이 옆으로 밀어젖혔다. 그러자 실내의 불빛을 받으며 크고 인상적인 사내의 모습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당당하고 품위있는 태도로 인사를 하였으며, 우리가 악수를 할 때 주의 깊게 나를 응시하였다.”

님 웨일스가 김산을 처음 만난 1937년, 옌안의 루쉰도서관에서 3개월 동안, 밀회 같은 취재기를 들었다. 대륙을 휘젓고 다니던 당찬 여성 언론인, 동료이자 남편이 된 에드거 스노에게 “아시아의 황후가 되고 싶어 중국에 왔어요”라고 농칠 정도로 통이 컸던 그는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마친 뒤 진을 치고 있던 옌안의 도서관에서 영문책을 유달리 많이 빌려간 한 청년을 주목했다. 그는 이름조차 낯선 나라 ‘조선의 혁명가’라고 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매번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생 스토리의 바다에 웨일스는 풍덩 빠져들고 말았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산에 대한 첫 설명이었다. 님 웨일스는 거칠고 험악한 그의 인생 구비마다 아리랑이 아롱져 흐르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전투에서 패한 뒤 우리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했지요. 가까스로 피운 모닥불 옆에서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며 울었소. ‘패배의 노래’, 날 잡아가는 일본 경찰에게 이렇게 얘기했었소. 이런 날 나오는 노래는 아리랑밖에 없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던 중 발가락 끝에 닿는 바닥 같은 노래.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 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을 때’ 불렀던 희망의 숨구멍 같은 노래 아리랑.”

그 노래는 김산만의 노래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의 해방을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남의 나라의 무장 봉기에 앞장섰다가 떼죽음을 당한 청년들, 조선은 해방되어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풍찬노숙 천지사방을 쏘다니다가 폐병으로 쓰러져 죽고 마적 떼에게 토막 나 죽어간 사람들, 폭탄 하나에 목숨을 걸고 총알 하나에 인생을 다퉈야 했던 그 허다한, ‘김산의 등 뒤에 선, 그러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김산들’의 노래였다. 님 웨일스는 김산만큼이나 그 노래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생애를 담아 발간한 책의 제목을 <아리랑>으로 붙였다. 님 웨일스는 원작 사용을 원칙적으로 허락하고, 이후 절차를 맡아줄 사람을 천거했다. 조지 토튼 정치학과 교수였다.

돌아와 김기팔 작가와 다시 만났다. ‘아리랑’은 참 좋은 작품이고 꼭 하고 싶은 작품이라면서도, 선뜻 나서질 못했다. ‘땅’에 대한 상처가 깊었다. 게다가 중국에 대한 불신도 남아 있었다. 김준엽의 <장정>을 꺼내들고 김승수 피디와 모처럼의 중국 답사까지 다녀왔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무산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 쪽과 ‘디테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제작비와 현장 진행, 미술 작업, 배역과 엑스트라 문제…, 시시티브이 쪽에서 ‘군중 장면은 최대 1만명까지 한꺼번에 동원하겠다’고 호언장담해서 웃고 말았다. 그리고 현지 판권은 본토로 한정하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그즈음 쌍방의 노력으로 김산의 아들을 찾아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고교 교사 고영광이었다. 아버지의 방랑과 ‘트로츠키주의자’ 낙인을 피해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고 했다. 베이징호텔에서 반갑게 만나 점심을 먹고 또 저녁을 먹을 때까지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나 김 작가는 오늘도 술만 마시고 있다. 끝없는 번민과 자학이다.

 84년 한국어판 서문을 쓴 인연으로 원작자 님 웨일스에게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2005년 8월 서울 인사
84년 한국어판 서문을 쓴 인연으로 원작자 님 웨일스에게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2005년 8월 서울 인사

리영희(왼쪽) 교수는 1960년대 님 웨일스의 <아리랑> 일본어판을 입수해 국내에 가장 먼저 김산의 존재를 알렸고
리영희(왼쪽) 교수는 1960년대 님 웨일스의 <아리랑> 일본어판을 입수해 국내에 가장 먼저 김산의 존재를 알렸고

엘에이에 살고 있는 토튼 교수가 한국에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칠 뒤 서울 에스 호텔에 자리잡고 서로 정중하게 만났다. 연달아 사흘 동안 만났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별났다. 한국에서 또 다른 사람이 <아리랑>를 영화로 만들겠다며 나섰는데, 어떤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쪽은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와 이장호 감독이란다. 따로 만나 얘기를 들어본다고 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우리 쪽 손을 들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원작료도 협의되었다. 생각보다 굉장히 저렴한 액수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쓸데없이 거품만 부풀려 있었던 셈이다.

중국 쪽에 이 소식을 전화로 알려주었다. 크게 환호를 보내왔다. 이제 큰 일정을 맞추고 제작비 조율만 남았다. 그때 시시티브이로서는 월사금을 내고라도 우리와 합작하고 싶어했다. 몇 번의 팩스가 오고 갔다.

김기팔 작가를 또 만났다. 과정도 설명하고 24부작의 큰 방향도 얘기했다. 김 작가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이 많이 아프단다.

대하드라마 <땅> 제작진(고석만 피디·앞줄 오른쪽 다섯째)과 출연진들이 1991년 4월26일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촬영을 마친 뒤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15회 중단’ 표시를 새겨 놓았다.
대하드라마 <땅> 제작진(고석만 피디·앞줄 오른쪽 다섯째)과 출연진들이 1991년 4월26일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촬영을 마친 뒤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15회 중단’ 표시를 새겨 놓았다.

<땅>의 강제종영이 결정되자 작가 김기팔은 1991년 4월26일 <국민일보>(사진) 등 언론과 인터뷰에서 절필 선언을 한 뒤 내내 술로 울분을 달랬다.
<땅>의 강제종영이 결정되자 작가 김기팔은 1991년 4월26일 <국민일보>(사진) 등 언론과 인터뷰에서 절필 선언을 한 뒤 내내 술로 울분을 달랬다.

다음 관건은 중국 쪽과 ‘에드거 스노’를 등장시킬 것인가, 아닌가를 합의하는 문제였다. 미국 촬영도 해야 하고 드라마의 관점이 크게 바뀔 수가 있다. 그의 등장이 주는 장점이 큰 반면, 행동반경이 넓어지는 만큼 제작비의 상승폭이 너무 컸다. 애초 우리 쪽은 미니 시리즈의 평균 제작비만 투자하고, 국외 촬영 비용과 유통 비용은 중국 쪽이 해결하기로 했었다. 중국은 에드거 스노의 등장 쪽에 많이 기울었다. 미국도 의식하고 마오쩌둥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치밀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

1937년 중국 공산당이 옌안에 주둔하고 있던 무렵 마오쩌둥(오른쪽)과 에드거 스노(왼쪽). 당시 님 웨일스의 남편이었던 에드거 스노는 대장정기를 기록한 <중국의 붉은 별>를 써낸다. 1991년 고석만과 한·중 합작 드라마 <아리랑> 제작에 합의한 <시시티브이> 쪽에서는 에드거 스노도 등장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1937년 중국 공산당이 옌안에 주둔하고 있던 무렵 마오쩌둥(오른쪽)과 에드거 스노(왼쪽). 당시 님 웨일스의 남편이었던 에드거 스노는 대장정기를 기록한 <중국의 붉은 별>를 써낸다. 1991년 고석만과 한·중 합작 드라마 <아리랑> 제작에 합의한 <시시티브이> 쪽에서는 에드거 스노도 등장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이 가장 신뢰한 서방 언론인인 에드거 스노는 1970년 8월 베이징 중국 창건 21돌 기념일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는 미·중 수교 과정에서 막후 연결자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마오쩌둥이 가장 신뢰한 서방 언론인인 에드거 스노는 1970년 8월 베이징 중국 창건 21돌 기념일에 초청받기도 했다. 그는 미·중 수교 과정에서 막후 연결자 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드디어 계약일이 되었다. 우리 팀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날 저녁 베이징 조인식에 맞춰 공항으로 나섰다. 행정 담당까지 모두 4명이다. 그런데 잠실 사옥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 데스크의 여성 직원이 뛰어왔다. “본사 최창봉 사장님의 전?니다. 안내 데스크로 바로 하셨어요.” 의아해하며 쫓아가 받았다. “오늘 중국 가지?” “예, 오늘 밤 계약합니다.” “가지 마! 나중에 얘기해 줄게.” 전화는 뚝 끊기고, 그 한마디로 ‘올 스톱’이 됐다.

그날 오후 여의도 본사 사장실로 달려들어갔다. 나는 특히 최 사장에게 국제관계의 신뢰 문제를 들어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시카고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하고 왜 팩스를 주고받았느냐? 안기부에서 체크했다. 안기부가 걱정한다.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정리하고….”

안기부에서 한마디 했다고, 이 길고 긴 역사를 다 없앤다고 없어지는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이른바 북한 남침설에 대한 수정주의 이론을 담은 이 한 권의 책 때문에 안기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안기부가 팩스를 도청할 기술도,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부자의 소행이다. 안기부의 프락치가 우리 드라마부의 국장급 중에 있었다. 누군지(유아무개) 다 알았다. 왜 그랬는지도 알았다. 그는 안기부 요원과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여러 차례 들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수사 드라마 연출할 때 도와준 술친구’라고 둘러댔다. 그러더니 요즘엔 권력을 과시하듯 공공연하게 만나고 다니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때 또 반전이 연출된다. 최 사장은 웃으며 내게 명령했다. “동포애 차원에서 <연변티브이>에 가서 한달만 수고하고 와! 한달! 중국 잘 알잖아? 조선족이 운영하는 조선어 방송국인데, 티브이 드라마를 만들고 싶대. 대본 쓰는 법부터 콘티 짜고 녹화하는 것까지, 에이부터 제트까지 가르쳐 주고 와! 동포애 차원에서 갔다 와! 동포애!” 이번엔 유배였다. 유배!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