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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의 자장가 “78년 이어왔죠”
만리재 이발사 이남열씨

▲ 지난 78년간 3대째 이어지는 이용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남열씨는 “손때 묻은 건물에 손대고 싶지않다”며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키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그 느낌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부드러운 솔에 담뿍 묻은 비누거품이 목 뒤를 휘감는다. 그 비누거품은 연탄난로 위에서 하루종일 더운 물을 생산해내는 따뜻한 양철통의 몸통을 거친 것이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대중목욕탕에서 이발할 때 뒷머리 면도를 위해 ‘쓱쓱’ 바르는 그런 차가운 로숀의 느낌과는 비교가 안된다. 아! 맞아. 어릴 때 동네이발소에서는 당연히 이랬는데…. 졸음을 참으며 이발을 하고 난 뒤, 이발사 아저씨는 연탄난로 연통이나 들통에 비누솔을 문질러 면도를 해주곤 했지….

면도날이 살갗을 스친다. 털이 깎여 나가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상쾌한 느낌이다. 거친 면도날에 털과 함께 살갗이 뜯겨 나가는 것을 걱정하는 그런 시간이 아니다.

3대째 이어온 가업… 1927년 외할아버지처럼
숫돌에 면도칼 갈고 사각사가가 감미로운 가위질
“손님은 하루 10명만”


“면도는 왼손으로 하는 겁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면도칼 그냥 대고만 있는거죠.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살갗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당겨야 합니다. 이것이 기술이죠.”

3대를 거쳐 한 장소에서 이발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이용원에서 이발을 하며 ‘행복’한 기분은 처음부터 시작됐다. 머리칼이 잘리며 들리는 소리는 감미로웠다. 아주 작은 소리로 “사각사각, 사각사각….” 마치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의 자장가 같았다.

머리칼이 잘려나가는 ‘싹뚝싹뚝’ 소리가 나지 않고, 날렵한 가위 날끼리 스쳐가는 소리이다. 때론 아주 빠른 템포로, 때론 아다지오의 느린 템포로.

“이발사는 먼저 가위를 숫돌에 가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정성들여 가위날을 세운 뒤에 가위질을 해야 합니다. 또 손님의 머리칼을 보고 가위를 선택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털, 굵은 돼지털….”

의자 앞 조그만 서랍에 6개의 가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20분 정도 가위를 갖고 머리를 다듬은 그 이발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발해야 좋은 이발입니까?”

“가위질 자국이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방금 이발한 느낌이 안나고, 자연스럽고, 오래갑니다.”

헉! 가위질 자국이 나지 않는 이발기술. 면도칼은 일제시대부터 쓰여진 독일제. 상아로 만든 손잡이에 붉은 인장이 새겨져 있다.

면도칼을 든 이발사는 문 옆에 가 칼을 간다. 문에 걸려있는 검은색 말가죽이다. 1950년도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그 말가죽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면도날을 세우고 있다.

옆 눈길로 쓰는 빗을 쳐다 보았다. 플라스틱 빗인데 30년을 썼단다. 이가 빠지고 낡아 골동품 수준이다.

“이 빗으로 한 때 서울시내 유명호텔에 드라이만 하러 다녔습니다. 머리칼을 10cm 이상 세워 가르마를 타곤 했죠.”

플라스틱 물통에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머리를 감아준다. 타일이 헤진 세면대. 어디 타일만 헤졌으랴. 20년된 이발소 의자, 15년된 레코드 턴테이블, 올이 터진 조그만 수건. 그리고 건물이 찌그러져 문짝이 어긋난 대문. 페인트를 수십번을 덧칠해 두텁게 갈라진 문짝. 타버린 연탄재.

서울역 뒤편 만리재의 만리동 시장 골목에 자리잡은 ‘우성이용원’은 1927년부터 78년간 3대에 걸쳐 숱한 동네사람들의 머리를 더듬어 온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이다. 현재 ‘이발장인’을 맡고 있는 이는 이남열(58)씨. 1965년, 당시 이씨가 18살 때부터 아버지 이성순(작고)씨에게 물려받아 운영해오고 있다.

처음 이곳에 이발소를 차린 이는 이씨의 외할아버지인 서재덕(작고)씨. 일제시대 이발사 면허증 2호를 갖고 있던 서씨는 1927년 당시 복숭아밭이 많이 있던 만리재에 이발소를 차리곤, 자신의 이발소에서 일하던 성순씨에게 자신의 딸을 주며 후계자 겸 사위로 삼았다. 성순씨의 면허 번호는 212번.

성순씨는 6·25동란 통에 미군부대 이발을 다니며 큰 돈을 벌었다. 이른바 ‘아리랑 이발’. 전장터에 나가는 미군들이 정성들여 이발을 하곤, 그것을 사진찍어 “내가 죽으면 고향에 사진을 부쳐달라”며 달러 팁을 마구 주곤 했다는 것. 미군부대를 나서며 헌병들에게 빼앗기더라도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면 달러가 ‘툭툭’ 방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도박벽이 있던 탓에 집의 쌀통엔 항상 바닥긁는 소리가 났다. 7남매의 5째로 태어난 남열씨는 중학교 졸업 뒤,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가윗날을 가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가위로 하는 일본식 이발에 정통한 이발기술은 소문이 나며 한 때 3명의 종업원을 두고도 손이 달릴 정도로 바빴다.

너무 젊은 나이에 집안을 책임진 남열씨는 한 때 방황도 했지만 30대 후반에 결혼을 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1990년대 말에 아이엠에프 사태가 오며 돈을 벌었다. 이전엔 퇴폐이발소에 가던 동네아저씨들이 이발을 잘하고 가격이 싼 동네이용원으로 몰린 것이다.

“한 1억5천만원 정도 번 것 같아요. 아버지는 6·25 전쟁 때문에, 저는 아이엠에프 덕분에 돈을 벌었어요, 허허….”

키(158cm)가 작은 남열씨는 발판을 놓고 머리를 깎곤 한다. 배가 나온 아저씨들이 의지에 앉아 고개를 숙이기 힘들어 해서 높이 20cm 정도의 발판을 만들어, 자신이 올라가 이발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고객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무리 손님이 몰려와도 하루 10명 이상의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남열씨의 이발기술에 반해, 원주로 이사간 40대 남자는 한달에 한번씩 스포츠형의 이발을 하러 온다. 또 한 40대 남자는 아버지 때부터 2대에 이어 단골이기도 하다. 기계로 하는 5분짜리 이발체인점이 번성하고 있는 지금, 가위 이발을 고집하는 남열씨는 아직도 매일 아침마다 독일제 숫돌에 면도칼을 간다.

점심 때가 되자 부인 이욕연(49)씨가 이쁜 보자기에 싼 점심밥을 가져온다. “아! 맛있겠다.” 남열씨는 보자기를 펴며 입맛부터 다신다.

이길우 선임기자




기사등록 : 2005-12-20 오후 06:30:42기사수정 : 2005-12-21 오후 01:5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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