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2차 수사기관이니 반성할 게 없다?
[사법부 미래] 과거정리에 달렸다 ④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김태규 기자
검찰 할 말이 없는가 사진 왼쪽부터 고문기술자 이근안씨로부터 당한 고문 사실을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당한 피해자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성고문을 무혐의 처분당한 권인숙씨, 국가안전기획부에서의 고문 사실을 무혐의 처분당한 홍성담씨,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은폐당한 고 박종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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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소권 독점…고문사실 알고도…가해자 은폐·무혐의

“간첩사건 등에 있어서 검찰은 2차 수사기관일 뿐이다. 또 기존의 확정판결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법률적인 혼란이 일어나는 만큼, 독자적으로 과거사 반성을 추진하기도 어렵다.”

국정원·국방부·경찰과 법원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거사 정리의 움직임 속에서 유독 검찰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가장 전향적인 태도가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 7일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발효되면 법에 따라 협조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과거 검찰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국민께 사과드리고 검찰도 어떤 기관보다 과거사 정리에 앞장서도록 하겠다”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조작 사건을 직접 수사하지 않았으니 직접 책임이 없으며, 최종 판단을 내린 법원과 따로 과거사를 밝힐 수는 없다’, ‘수사는 중정이나 안기부가, 최종 판단은 법원이 했으니 우리는 책임이 없다’는 게 검찰의 셈법인 듯하다.

그러나 독재시대의 검찰이 정권에 불리한 사건의 축소·은폐에 적극 개입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 때 검찰은 박씨가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밝혀내고도 고문 경찰관 2명을 기소하는 선에서 서둘러 사건을 덮었다. 고문경찰관들은 교도소에 갇힌 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당시 주임검사였던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에게 “진범은 따로 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추가 수사는 하지 않았다.

안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87년 5월11일, 안기부 J단장(정형근 현 한나라당 의원)과 마주 앉았다“며 당시 J단장이 “안기부로서는 사건 진상이 새로 밝혀지면 정부가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이 사건은 절대 깨져서는 안 된다. 이 상태에서 재판이 끝나야 한다. 이것이 안기부 방침이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안기부, 보안사, 법무부 등이 함께 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 결론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변명인 셈이다.

그러나 진실은 구속된 경찰관들과 의정부교도소에 함께 수감돼 있던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의 통해 드러났다. 이 처장의 제보를 받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같은해 5월18일 이런 사실을 천하에 폭로했다. 구속된 경찰관들이 검찰에 ‘고백’한 지 3개월 뒤였다.





‘안기부·보안사 등 시키는대로’ ‘정권에 불리해서’
김근태·권인숙씨 사건등 피해자 호소 철저히 묵살
‘직접 수사 안했으니 직접 책임없다’ 논리는 기만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도 검찰이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법원이 소극적으로 ‘올라오는’ 사건을 처리했던 것과 비교해, 검찰이 법원에 앞서 ‘준사법기관’으로서 기소·불기소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과거사 문제에서 검찰의 책임이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검찰이 안기부(중정), 치안본부, 보안사(기무사) 등에서 올라온 조작 사건을 그저 ‘시키는 대로’ 기소한 것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5공화국 시절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김근태씨 고문 사건에서 검찰은 자신들의 기소독점권을 악용했다. 김씨는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라는 ‘이적단체’를 만들고 월북을 기도했다는 혐의 등으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 등으로부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처참한 고문을 당했다며 이씨 등을 검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씨 등을 무혐의 처분했다. 뒤이은 재정신청에서 서울고법이 “검찰의 수사기록이 워낙 미진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조차 어려워 재판부가 심증 형성을 위해서는 직접 관련 경찰관들을 조사할 수밖에 없다”며 직접 ‘수사’를 할 정도였다. 99년 이근안씨가 잡힌 뒤에야, 당시 주임검사가 고문 사실을 짐작했다거나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김씨의 상처를 은폐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피해자의 고문 주장을 애써 ‘뭉개는’ 검찰의 행태는 이어졌다.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을 그렸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기소된 화가 홍성담씨는 89년, “안기부에 잡혀가 벌거벗긴 채 몽둥이로 매질을 당했다”며 안기부 수사관 8명을 독직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고소장에는 신체감정서와 함께 홍씨가 그린 고문수사관의 정밀한 몽타주까지 첨부됐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한 지 6년이 지난 95년, “안기부 대공수사관들의 신원을 공개할 수 없다”며 대질조사도 하지 않은 채 무혐의 처분으로 끝내버렸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과거 검찰은 자신의 사건종결권을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나 고문을 감시하는 데 쓴 것이 아니라 사건을 덮는 데 사용했다”며 “이것이 검찰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수사발표문에 성고문 ‘성’ 자도 나와선 안돼”

전두환정권에 날조·왜곡 ‘부천서 성고문 사건’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검찰은 정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날조·왜곡된 수사결과를 버젓이 발표하는 큰 오점을 남겼다.

검찰은 1986년 7월, 가해자인 문귀동 경장을 철저하게 수사해 사실관계를 대부분 밝혀놓고도 “폭언·폭행은 있었으나 성 모욕행위는 없었다”며 문 경장을 기소유예 처분했다. 수사 경찰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성 폭행을 당했다는 권인숙씨의 주장과 달리, 주먹으로 가슴을 서너 차례 쥐어박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또 “권씨가 폭행사실을 성 모욕 행위로 날조·왜곡함으로써 자신의 구명과 아울러 일선 수사기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반체제 혁명투쟁을 사회 일반으로 확산시켜 정부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려했다”는 발표를 했다. 공안당국은 해설용 배경 보도자료와 함께 이를 잘 보도해 달라고 기자들에게 ‘촌지’까지 돌렸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결과가 날조됐다는 사실이 확인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권씨의 변호인단이 법원에 낸 재정신청 심리를 통해 검찰이 이미 문 경장의 가혹행위를 확인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권씨의 재정신청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재판부는 검찰의 수사결과만으로 판단한 결정문에서 권씨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권씨의 상의를 모두 올리고 양손으로 가슴을 만지면서 … 겁을 주고 욕설을 하면서 허리 부분과 상체를 어루만지는 등 추행을 한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당시 인천지검장으로 문 경장 수사를 지휘했던 고 김경회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을 만나고 온 서동권 검찰총장으로부터 “수사 발표문과 대통령 보고문에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안기부의 지침을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이 지침을 접한 담당검사는 소리 내어 울었고, 자신은 집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그는 기록했다. 당시 주임검사는 남충현 변호사였고, 부장은 뒤에 서울지검장까지 지낸 김수장 변호사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정권 차원의 외압을 한두 사람이 내부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준사법기관’이라는 검찰은 가해자·공범으로서뿐만 아니라 피해자로서 외압을 어떻게 당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국민의 성원을 받는 검찰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살아있던 검찰

1964년 중정 47명 연루 인혁당사건 발표
담당 중앙지검 이용훈 부장검사등 “혐의없음”
온갖 협박에 사표내며 무고한 죽음막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은 검사가 바로 서면 무고한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줬다.

중앙정보부는 1964년 8월14일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 김영춘의 지령에 의해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학생 데모를 조종했다”고 발표했다. 그 사흘 뒤 중정은 서울지검 공안부에 사건을 송치했다. 구속자가 22명, 불구속자가 12명, 미체포자가 13명으로 모두 47명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는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장원찬·최대현 검사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12일 동안 철저한 수사를 벌였지만 결론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결론에 대해 당시 서주연 서울지검장은 “어떻게든 기소해보라”며 애원했고, 신직수 검찰총장은 “부인하는 피의자들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질타했다. 이 부장검사는 법무부 장관실에서 법무부와 대검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소 불가’ 의견을 보고했다. 하지만 권오병 법무차관은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나.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나.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기소해도 되지 않나?”라는 질책을 쏟아냈다.

결국 이들에게는 ‘기소를 하지 않으려면 옷을 벗으라’는 최후통첩이 전달됐고, 이 부장검사와 김병리·장원찬 검사는 “기소를 안 하겠다면 공소장이라도 써달라”는 서울지검장의 요구마저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중정의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낀 공소장은 당직검사 이름으로 접수가 됐다.

그러나 이들의 용감한 ‘항명’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자, 검찰은 여론에 밀려 재조사를 했다. 최고 형량이 사형인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26명 가운데 14명은 공소취소로 풀려났고, 나머지 12명은 형량이 훨씬 가벼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이 변경됐다.

대법원에서는 이들의 유죄가 확정됐지만 이보다 앞서 서울지법에서는 도예종씨 등 2명을 제외한 10명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김형욱 중정부장은 뒤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살아있던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었다”고 적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기사등록 : 2005-10-24 오후 07:14:02기사수정 : 2005-10-25 오전 10: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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