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지도, 맑지도 않은 서해 바다에 난파선들이 수백년째 잠을 잔다.
누군가를 만나러 배에 오른 과거의 사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여정이 중단되었고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할 물건은 침몰 지점이 마지막 배송지가 되었다.
침몰선과 유물이 갇힌 갯벌은 수백년간 정지된 시간이다.
젓갈과 곡식의 껍데기마저 수백년을 견딜 만큼 갯벌은 미생물의 활동과 유물의 부식을 막는다.
육상 유물이 대부분 퇴적과 풍화를 거치며 계속된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면, 난파선은 침몰 당시 시간을 잘라낸 단면을 드러낸다.

한국이 발굴한 고선박은 14척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해양 문화재를 탐사·발굴하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4척 가운데 4척을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발견했다.
마도 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다.

   2011년 9월8일 양순석 연구사는 화물의 수취인과 발송자가 기록된 목간 한 점을 건져 올렸다.
고려 후기 60년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최고 권력자에 오른 노비 출신 김준을 암시하는 이름이 기록된 목간이었다.
이 침몰선이 빛을 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740여년. 기록되지 못한 죽음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내 단절된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양 연구사의 직업이다.
스치듯 지나치는 박물관의 수중 유물과 난파선은 수백년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찬찬히, 그리고 낯설게 들여다보자.

처음으로

그날 고려의 배는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목선에 차오른 바닷물의 높이는 모래시계처럼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벅지로 물이 차올랐다.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무 한 조각에 기댄 운명들은 바다 밑으로 잠시 사라졌다 치솟아 오르기를 반복하다 영원히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날 바다에 흩뿌려진 나무조각들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발송인과 수취인, 물건의 종류와 수량이 먹으로 쓰인 작은 나무 한 조각도 난파된 배에서 흘러나와 검푸른 바다 밑으로 낙하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던 배인지, 언제 침몰했는지, 바다에 빠진 이들이 누구인지 바다만 비밀을 품게 되었다.

‘사심김영공주택상(事審金令公主宅上) 담해생사십합오일항현례(䗊醢生四十合伍一缸玄礼)’
(사심 김영공 댁에 올림. 홍합 젓갈과 날 것 40항아리 합 51항아리)

나무 조각 위로 740년의 파도와 바람이 지나갔다.

처음으로
Video Loop 비디오 링크

 “유세차 2009년 기축년 오늘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 고하나이다. 아무 사고자도 없이 안전하게 하여주시는 자애로우신 보살핌을 어찌 감히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리요.…”  

개수제


2009년 4월30일 오전 11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조사팀장 양순석은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바다를 향해 절을 올렸다. 해저유물탐사선 씨뮤즈호에 조촐한 상이 차려졌다. 막걸리 한 잔이 바다에 뿌려졌다. 침몰선을 찾는 건 예고 없이 죽어간 과거의 비운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의식은 경건해야 했다.  

양순석은 난파선에 깔려 죽은 사람의 뼈를 본 적이 있다. 2007~2008년 마도 해역에서 태안선을 발굴할 때였다. 팔과 손을 이루는 뼈, 척추뼈 등을 미뤄보건대 160㎝ 키의 30대 남자는 얼굴 방향이 좌측으로 틀어져 있었다. 침몰 직후 윗몸을 틀어 빠져나오려다 숨진 남자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사망한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현장에선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개수제와 함께 시작된 탐사 첫날 청자 대접등 유물 13점이 인양됐다. 순조로운 출발이다. 최종 목표는 침몰선이다.  

처음으로
Video Loop 비디오 링크

양순석의 아버지는 섬과 섬 사이를 돌며 여객선을 모는 항해사였다.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가 익숙하긴 했지만 대학의 환경공학과에 입학해 남들처럼 평범하게 공부했다. 양순석은 자신이 ‘뱃놈’이 되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1994년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입사해 유물 보존 처리를 담당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목선의 염분을 빼고 약품처리를 통해 단단하게 만드는 경화 작업이 양순석의 일이었다. 그가 연구복을 벗고 해양 유물 탐사·발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입사 8년이 지나서다.

해양유물 발견 신고가 급증하면서 연구소는 2002년 수중발굴팀을 꾸렸다. 그 전에는 해군이 수중발굴을 담당했다. 대학에 수중고고학과가 따로 없어 연구소의 다양한 전공자들이 팀에 합류했다. 팀원들은 뒤늦게 잠수를 배우고 현장에서 수중고고학을 개척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가진 못했다. 수중고고학을 하겠다고 들어왔다 나간 후배가 열다섯명쯤 되려나. 대부분 두 손 들고 가버렸다.

양순석은 조사원들 가운데 가장 오래 해양유물을 찾아다녔다. 양순석은 한국이 발굴한 고선박 14척 가운데 10척의 배를 발견하는 데 참여했다. 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중문화재를 탐사·발굴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도 바다에 나가 유물을 탐사·발굴하는 조사원은 8명뿐이다. 이들 손에 해양 유물과 수중고고학의 미래가 달려있다.

처음으로

망망대해에서 해양유물을 찾으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최신 장비도 드넓은 바다에선 소용 없다. 연구소가 보유한 해저유물탐사선 씨뮤즈호의 음파탐지기는 해저지형을 3차원으로 영상화해 바다 속 이상체를 확인한다. 튀어나온 선체나 선체의 파편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뻘 안에 잠긴 고선박이 음파탐지기에 잡힐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대개 유물 탐사는 이렇게 이뤄진다.

어부 등 민간인들이 해양유물을 발견하면, 수중발굴과 조사원과 민간잠수사가 신고 해역에 나가 ‘그리드’(격자무늬)를 짠다. 쇠기둥을 해저에 박고 줄을 묶어 대형 사각형을 만들고 이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을 계속 만들어가며 탐사의 세부 구획을 나눈다. 조사원과 민간잠수사는 여러 그리드를 옮겨 다니며 탐침이나 손으로 난파선과 유물을 찾는다. 지겨운 반복작업이다.

배가 침몰했다는 건 바닷속 환경이 최악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발굴도 위험하다.

양순석은 바다에서 수차례 위험한 순간과 마주했다. 탐사 구획을 그어놓은 밧줄에 잠수복이 걸려 허우적거리거나 갑자기 공기 호스에서 산소 공급이 차단되기도 했다. 발로 해저면을 잘못 디뎌 뻘이 뿌옇게 위로 튀어오르는 바람에 눈앞이 캄캄해진 경험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럴 땐 2인 1조로 바다에 들어갔다해도 서로 도울 수 없다.

 

처음으로

마도해역은 조운선과 중국의 무역선, 사신 행렬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나 마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은 물살이 세고 안개가 자주 일어 목숨을 걸어야만 오갈 수 있었다.

탐사해역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 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대부분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데….”
- <선화봉사고려도경>,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 1123년

“안흥정 아래 바다로 통하는 곳은 각처에서 모이는 여러 물줄기가 서로 부딪치는 곳이요, 또 험한 돌무더기가 있어 가끔 배가 뒤집혔다.”
-<고려사절요>

“마도 해역에서만 조선 태조∼세조 60년간 선박 200척이 침몰하고 선원 1200명이 숨졌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중종 25년

탐사해역


2007~2008년 어부의 신고로 마도해역에서 청자 운반선과 유물 2만5000점이 수습됐다. 수중 고고학 역사상 최대 성과에 고무된 연구소는 2009년 4월30일 마도 해역 일대를 대대적으로 탐사하는 프로젝트에 나섰다.

처음으로
Video Loop 비디오 링크

“2011년 5월7일 토요일 흐림. 오전 8시에 관공선 부두에서 소장 외 연구소 직원들의 배웅을 받고 출항했다. 해무가 짙어 조심스러운 항해를 했다.…”(마도 3호선 발굴 일보)

개수제를 지낸 지 737일이 지났다. 양순석은 여전히 마도에 있다. 2년간 탐사와 발굴은 성공적이었다. 2009년 한해에만 난파선 3척을 찾았다. 마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중 암초를 기준으로 서쪽의 1지구에서 한척, 동쪽의 2지구에서는 두척을 발견했다. 각각 마도 1·2·3호라 이름지었다.

마도해역 바닷속 유물


2009~2010년 마도 1,2호선은 유물과 선체 인양이 끝났다. 이제 3호선 유물을 인양한 뒤 선체를 건져올리는 일만 남았다. 마도 3호선은 이제껏 발견된 침몰선들과 달리 거의 모든 선체가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Video Loop 비디오 링크

마도 3호에 담긴 유물 발굴을 위해 2011년 5월7일 첫 항해를 시작한 지 두달동안 뻘만 퍼내고 있다. 좌현과 선수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마도 3호선은 뻘 속에 묻혀 있다. 유물 몇 점 나온 게 고작이다. 마도 3호는 텅 빈 배일까. 뻘을 제거하는 작업은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다. 조사원들은 기다리다 지쳤고 어떨 땐 조바심이 났다.

목간

 “목간이 발견됐습니다!”
(2011년 9월8일. 마도 3호선 발굴 조사 시작 125일째)

수취인과 발송인, 물품의 종류와 수량을 나무 막대기에 기록한 목간은 침몰선의 연대를 풀어주는 열쇠다. 목간이 발견되면 조사원과 잠수사들의 작업이 일시 정지된다. 수백년간 바닷물이 베어들었을 목간은 잘 못 만지는 순간 글자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양순석은 직접 바다로 뛰어들었다. 오래된 목선이 보인다. 마도 1, 2호와 달리 거의 훼손되지 않은 배다. 선체 북반부에서 뻘이 묻어있는 목간을 플라스틱 상자에 담았다. 목간 표면에 먹물로 쓰인 글자가 지워지지 않으려면 뻘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 뻘은 오랜 시간 유물이 손상되지 않게 보호하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목간은 태안보존센터 연구실로 옮겨졌다.

목간


‘사심김영공주택상(事審金令公主宅上) 담해생사십합오일항현례(䗊醢生四十合伍一缸玄礼)’
(*현례라는 고려인이 사심 김영공 댁에 홍합 젓갈과 날 것 40개의 항아리 등 총 51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

목간에 적힌 ‘김영공(令公)’은 누구인가. 마도3호선에서는 총35개의 목간이 발견됐는데, 다른 목간에 적힌 수취인들의 활동연도로 추정한 배 침몰 시기는 1265~1268년이다. 이 시기에 왕실 제왕에게만 붙이던 극존칭인 ‘영공’ 칭호를 받던 이는 김준뿐이다. 마도3호선은 1265~1268년 어느 하루, 여수 사람 현례가 김준에게 보낸 홍합 젓갈 등 51개의 항아리를 싣고 항해 중이던 배였다.  

처음으로

1258년 3월26일. 노비 김준은 60년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김준과 그의 조력자 유경은 날이 밝자 왕이 있는 편전으로 들어갔다. 원나라와 최씨 무신정권의 득세에 ‘종이 왕’에 불과했던 고종은 김준의 노고를 치하했다. 쿠데타에 대한 ‘사후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60년이 하루 아침에 끝났다.

노비였던 김준은 최충헌의 아들 최이의 눈에 들어 호위 무사로 발탁되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김준은 최이에 의해 정9품 벼슬을 받는다. ‘최이-최항-최의’로 권력이 세습되는 동안 김준은 ‘문고리 권력’을 발판삼아 힘을 키웠다.

1258년 1월, 김준은 자신의 측근 송길유가 탄핵될 위기에 놓이자 이를 막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최의는 송길유를 유배보냈고 권력에서 제외될 위기에 놓인 김준은 1258년 3월26일 쿠데타를 일으켜 최의를 살해했다. 그러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쿠데타 10년(1268년 12월)만에 김준은 측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011년 10월24일 맑은 날. 양순석은 유물 발굴만 마치고 마도3호선을 떠났다. 나중에 인양될 배는 여전히 뻘 속에 묻혀있다.

처음으로

바다 속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갯벌 안에 숨은 수백년 전 과거를 세상에서 가장 처음 보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양순석은 2007~2008년 태안선 발굴 당시 청자가 수놓은 바다 위를 떠다닌 기억을 잊지 못한다. 고려시대 옥빛 청자는 영롱한 빛을 내며 갯벌 속에 8m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유물이 다칠까봐 발로 밟지 않고 청자 위를 떠다니며 일렬로 줄지은 푸른 빛깔을 바라보았다. 그 시간과 공간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혼자만의 것이다.

유물사진


그러나 황홀한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유혹적이다.

2007년 태안선 발굴에 참여했던 민간잠수사는 유물을 빼돌렸다. 뻘 속에 묻어둔 뒤 발굴이 끝나자 끄집어내 팔아치우려했다. 국정원 직원이 매수자로 위장한 끝에 붙잡았다. 그는 10억원 정도를 요구했다고 한다. 양순석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지난해 진도 발굴 현장에서도 잠수사와 선박직 직원이 유물을 빼돌렸다가 검거됐다.  

유물복원사진


탐욕에서 빗겨나 뭍으로 올라온 마도 3호선 유물은 현재 태안 연구실에서 복원 중이다. 이제껏 발굴된 고려 선박 가운데 상태가 가장 양호한 마도3호선은 분해하지 않고 통째 인양할 계획이다.

처음으로

잃어버린 시간은 바다에 원형 그대로 잠들어 있다.
유물은 부식을 막는 갯벌이란 타임캡슐 안에서 수백년을 견딘다. 지구 70%를 이루는 바다의 비밀이다.
양순석은 바다의 비밀들을 캐내어 뒤늦게 기록으로 남긴다. 740여년 전 죽은 고려의 배에 마도 3호라 이름 붙였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도 그가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다.

처음으로

보물선, 비밀을 품은 시간

취재 : 박유리
기획 : 김원철·이화섭
사진 : 강재훈·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일러스트 : 김대중
제작 : 디지털기술부문

뉴스그래픽 더보기

처음으로
계속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