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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경내에서 법인스님과 반려견 다동이.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 경내에서 법인스님과 반려견 다동이. 사진 실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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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당연하고 익숙한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잘 알고 있는 것도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질문해 본다. 그중 늘 곁에 모시는 ‘부처님’을 다시 돌아본다. 이천칠백년 전 사람 사는 곳에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 나의 삶에 부처님은 어떤 분이었는가? 그분을 언제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가?

어린 시절, 동네 할머니, 어머니들이 부처님께 불공드린다고 하셨다. 목욕하고 옷을 정갈하게 입고 하얀 쌀을 머리에 이고 절에 가서 자식들 잘 되라고 부처님께 공을 들이셨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힘이 센 분이구나 생각했다. 국민학교 때 이 세상에는 교회와 목사가 있고, 절과 스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혹 동네에 와서 목탁을 치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는 사람이 스님이고, 그분들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을 알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족들과 집 근처 장성 백양사에 갔다. 처음 가는 절이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말로만 들었던 부처님을 처음 봤다. 첫인상은 왠지 낯설고 무섭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음식을 바치고 절을 하는 것을 보니 화려한 금빛 장식의 저분은 능력이 많으시구나 생각했다. 그즈음, 담임 선생님이 내게 책 한 권을 주셨다. 부처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었다. 책이 귀하던 그 시절에 호롱불 앞에서 정신을 바투 잡고 집중해서 읽었다.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와 인도 땅에 태어나서 출가, 수행, 깨달음, 교화, 열반한 생애를 다룬 책이었다. 이야기 전개가 매우 재미있어서 새벽까지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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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불상의 부처님을 넘어 사람의 몸으로 살았던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왕자의 신분으로 호화롭게 살았으며 최고의 교양과 학식을 갖춘 로열패밀리였다. 허나, 그 역시 생로병사의 한계상황에서 괴로워했고, 출가했으며, 수행으로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이후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그들을 복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상사에서 서로 절을 하는 모습.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에서 서로 절을 하는 모습. 사진 실상사 제공

불상의 부처에서 사람 부처를 만나면서 부처님이 다르게 보였다. 머리가 영특하신 분, 미래가 보장된 부귀영화에 안주하지 않으신 분,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으신 분, 신분과 권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신 분, 한없이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이 부처님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11살 소년에게 다가온 부처님은 그런 부처님이었다. 그 후 중학교 때 교회를 2년 정도 다녔고, 3학년 때 우연히 불교학생회에서 법문을 듣고 어린 시절 만났던 부처님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게 나는 17살 출가 수행승이 되었고, 이제 곧 출가 50년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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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후 나는 부처님 생애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집중했다. 평온과 기쁨이라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를 불안하게 묶고 있는 번뇌, 악습, 사견, 감정의 해체와 정화가 절실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교설에 주목했고, 선정 수행에 전념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했다. 이런 나의 여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치중하여 부처님의 삶을 천착하는 것에 소홀했다. 부처님이 당대에 어떤 사람을 만났고, 슬프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온갖 소리를 어떤 마음으로 들었으며, 그들에게 내민 손길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열반에만 골몰하여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숙고하지 않았다. 이제야 세상 사람들을 향한 부처님의 뜻이 보이고, 그 뜻을 펼친 말씀이 보이고, 그 말씀을 전한 발걸음이 보인다. 나무 석가모니불!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한 밥상에서 공양하는 실상사 공양간. 사진 실상사 제공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한 밥상에서 공양하는 실상사 공양간. 사진 실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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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에 계실까? 해마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오실까? 관용적인 찬탄 어구를 떠나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답은 간명하다. 부처님은 당신의 뜻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곳에 오시고, 머무르신다. 예수님의 부활도 같다. 예수님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절실한 곳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불교 경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생명의 존재 방식이 ‘이것을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작용하므로 저것이 작용한다’는 연기의 이치라고 한다. 어떤 존재의 탄생과 성립, 즉 결과는 그에 합당한 원인과 조건의 마주함과 부딪침으로 발생한다는 인과 법칙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 인간과 자연의 곳곳에서 적용된다. 부처의 출현도 이 연기법에 근거한다. 역사의 현장에 오신 부처님이 생명의 실상, 삶의 법칙을 깨닫고 부처가 된 것도 연기 법칙이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 계신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먼저 절에 가면 부처님이 계신다. 대웅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등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 특히 우리나라 사찰은 수려한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산중에 있어서 부처님을 참배하며 절로 마음이 기쁘고 편안해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시가 저절로 나온다.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 손을 잡고 갔던 절이라면 더욱 정답고 좋을 것이다. 도심 사찰에서도 부처님을 뵐 수 있다. 마음이 힘들고 지치면 절에 가서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리고 염불하고 참선하면 어느새 평온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형상의 부처님을 만나고 대화한다.

그런데 간혹 불자들이 부처님과 스님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무슨 연유로 불자들이 부처님을 뵈러 가는 발걸음이 무거울까? 불상으로 계시는 부처님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탓은 사람에게 있다. 스님들 때문에 절에 가는 마음이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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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자가 오랫동안 잘 다니는 절이 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봉사하면서 불자로서 자긍심을 갖고 신행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절 주지 스님 임기가 만료되어 새로운 스님이 부임했다. 불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새 주지 스님을 맞이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주지 스님이 이상했다. 주지 스님과 함께 온 다른 스님들도 세간 상식과 교양에 심하게 어긋나는 일탈이 비일비재하다. 사찰 운영도 독단적이고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재정도 불투명하고 불자들에게도 편향이 심하다. 지역 사회에서도 비난이 많다. 사정이 이러하니 불자들은 그 절에 다니기가 싫어서 발길을 끊거나 다른 절로 간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변하지 않는다.

실상사 농장에서 일하러 나선 법인 스님. 사진 실상사 제공
실상사 농장에서 일하러 나선 법인 스님. 사진 실상사 제공

남은 불자들은 고민이 많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친구들이 말한다. 절은 마음 쉬고 공부하는 곳인데 그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절이라면 가지 말든지, 아니면 좋은 스님들이 있는 절로 옮기라고 권한다. 이런 충고에 어떤 불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스님 보고 절에 가나요? 부처님 보고 절에 가지.” 많은 사람이 이 말에 동의하기도 한다. 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불자들의 고운 마음과 절에 대한 애정을 몰라서가 아니다. 내가 놀란 이유는 그들이 매우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보고 절에 간다’는 이 말이 왜 오류인지 짚어보자. 먼저 스님-절-부처님에 대한 정의와 관계성이 잘못 설정되었다. 첫째, 어떤 사람이 스님인가? 머리 깎고 승복 입고 승적을 취득하여 절에 살면 스님인가? 아니다. 생각과 언행에 ‘스님다움’이 깃들어야 스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잘 전해야 스님이다. 이웃을 차별하지 않고 연민과 자애로 품어야 스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름만 스님일 뿐이다. ‘가사만 걸쳤다고 비구인가, 나이만 많다고 장로인가?’ 법구경의 말씀이다.

둘째, 어떤 곳을 절이라고 하는가? 대웅전이 있고 불상이 있고 의례의식을 행하면 그것만으로 절인가? 언행과 태도가 몰상식한 대중들이 살고 있으면 절이 아니다. 빈부와 권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곳은 절이 아니다. 인과법과 업보의 이치를 적용시켜보면 절에 도둑놈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즉시 도둑놈 소굴이다. 반면에 세속에서도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절이다.

셋째, 형상으로 있는 불상이 부처님이 될 수 없다.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분이 부처님이라면, 지혜와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정진하는 스님들이 곧 부처님이고 함께 공부하는 불자들이 곧 부처님이다.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어떤 마음 씀일 때 스님, 절, 부처님인지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스님-절-부처님의 관계도 명확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며 전하는 스님들이 수행하면 그분들이 현재와 미래의 부처님이다. 그 뜻을 따르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공동체가 곧 절이고 부처님들이다. 이치가 이러하기에 “스님 보고 절에 가나요, 부처님 보고 절에 가지”라는 말은 바뀌어야 한다. “부처님 법을 따르는 스님들 보고 그 절에 가요. 그런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까요”라고 전환해야 한다. 이게 바로 관점의 혁명이고 업의 전환이다. 『유마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보살이 만들고자 하는 이상적인 세계인 정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중생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라네. 지혜가 있는 곳, 자애와 연민이 있는 곳, 나눔과 섬김의 보시가 있는 곳이 정토라네.” 이 말씀에 의지해 보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하다. 형상의 부처님을 보고 절에 가지 말고 부처님 뜻을 펼치는 절에 가야 한다.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오늘이다. 그 원인은 종교인들이 부처님과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바른길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그들의 일탈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스님을 몰라보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목사를 몰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설령 안다고 해도 무리에서 소외되는 두려움을 감당하기 힘들어하고, 인맥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약해진다. 하여, 붓다와 예수의 건강한 뜻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시라. 자신의 사심, 편견, 어리석음, 두려움, 우유부단함, 작은 이익 등을 과감하게 버리시라. 세상에는 가슴 따뜻한 종교인이 많다. 그런 공동체에 가시라. 눈 밝고 현명한 신자들이 많아지면 자격 미달의 성소는 적막한 찬바람만 불 것이다. 부디 잘 생각해 보시라.

천길 벼랑 끝의 나뭇가지 붙잡고 있는 그대

당장 그 손을 놓으시라.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대

당장 한 걸음 내디디시라.

지금, 여기, 머뭇거릴 이유 없네.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