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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One) 가지만이라도 족 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장41절·42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한(One) 가지만이라도 족 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생명(靈·영)의 양식은 하나(One)의 진리뿐이다’는 의미이며, 무심(無心), 무아(無我)로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천국(극락)의 자리(One)이다.

현대물리학이 에너지일원론(energy一元論)으로 증명하고 있는 오묘한 하나(One)의 경지는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사유(ego)로부터 벗어나 만물을 상호의존과 평등·무차별하게 보는 보편적 진리이다(일미평등·一味平等). 묵상, 명상 등의 수행으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원성의 ‘거짓 나’(겉 사람)를 소멸하고,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비이원성의 참나(속사람)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한 평안과 환희심을 일으키게 한다(요한복음 12장25절).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것과 하나(One)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둘이 아닌 하나(One)이며”(갈라디아서 3장20절), “만물이 주(One)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도생만물·道生萬物, 로마서 11장36절). 즉 우리가 분별 시비하는 허상(거짓 나)을 제거한다면 영원한 실상(참나)인 하나(One)가 된다. 이러한 하나(One)는 순수 의식이며, 항상 우주의 정기(精氣)인 에너지로 넘쳐흐르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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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릇 살아서 나(진리)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한복음 11장26절)고 말씀하신 것은 ‘진리(道)는 영원함으로, 안개와 같은 육신의 몸은 죽어도 영(靈)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도덕경 16장). 베단타 철학은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불교는 ‘모든 것은 근원인 일심(一心)에서 나오고, 다시 일심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과 본체의 바탕이 하나라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인 진리의 세계에서는 주객 이분법으로 나누어지는 타자(他者)란 있을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 예수는 모양이 없는 진리(道)란 말과 글로써 표현되어 질 수 없고, 사람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점을 아셨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법집(法執)으로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하나이며, 둘이 아닌 진리(생명)의 가르침은 집착을 벗어나 항상 그 시대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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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구약이 전하는 무섭고 잔인한 타자(他者)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은 주객을 초월하여 전체로서 하나(One)이며, 무차별적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다르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벗어나 근본에서 보는 하나의 진리로 재해석을 하여야 한다. 궁극적 실재인 오묘한 하나의 하나님 즉 부처님(道)으로 가득 한 이 세계는 조화롭고 경이롭기 그지없으며, 저절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충기이위화·沖氣而爲和, 도덕경 42장).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6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나’는 나누어질 수 없는 보편적, 절대적인 진리의 ‘나’(One)이다(요한복음 8장58절). 그러나 ‘나’를 상대적인 ‘나’(ego)로 잘못 해석하여 인류에게 많은 불행을 초래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너와 나, 주와 객, 선과 악을 나누는 이원적 사고에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One)의 진리이다.

글 구자만 신학박사(개신교 장로 · 신흥지앤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