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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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부하던 여성이 추석을 앞두고 명절에 시댁으로 가지 않고 강원도의 수도원으로 간다고 선언했다. 남편이 펄쩍 뛰었다. 이에 단호하게 말했단다. 허용하지 않으면 이혼을 하겠다고. 남편이 투덜댔지만 막지 못했다. 그래서 며칠간 수도원에서 책도 읽고 동네 구경도 하며 쉬었단다. 결혼 후 가장 널널하고 행복한 명절이었단다. 이 이야기를 듣던 모두가 박수를 쳤다. 나는 더 크게 박수를 쳤다.

불화하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노동자가 파업을 하고 공장을 정지시키고 몽둥이를 맞아가며 싸울 때 약간의 대가를 얻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임금이 조금 오르고 인권이 보호되었다. 시민들이 봉기를 하고 거리로 뛰쳐나와야 권력자(왕, 귀족, 지주, 정치인, 의원 등등)가 양보를 한다. 아는 체, 친절한 체한다. 물론 처음에는 회유도 하고 여차하면 마구 학살했다. 힘이 집결되면 뒤로 물러서고 요구를 겨우 받아들인다. 불화하지 않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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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이 파업, 불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 행위가 없었더라면 집의 반려견 짖는 소리보다 소홀히 여긴다. 물론 불화가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가장 좋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가해자는 교활하여 점잖게 접근하면 꿈쩍도 안한다. 불화를 일으킬 때 반응한다. 문제를 삼고 사건화할 때 겨우 문제를 인식하고 대화 상대자로 나선다. 그렇게 자신에게 미칠 불이익이 예상되고, 다른 이들의 시선과 연대가 생겨나면 협상 상대가 되기 시작한다. 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무죄’다. 불화는 대화를 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거나 혹은 처벌한다. 정의가 형식적으로나마 이루어지고 회복이 시작된다. 불화하지 않으면 문제를 알 수 없다.

대전의 그 유명한 문학계 성폭력 전문가, 누군지 알 것이다. 오래전 나는 그 인간의 피해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들어보니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성폭력의 전문가. 피해자가 현재 몇명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수십, 수백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여성계의 평가다. 이 작자는 문학소녀나 작가나 예비 작가를 주로 노린다. 그리고 매우 교활하게 접근해서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말한다. 즉 소송이 발생하면 상호 로맨스나 자발적 연애로 둔갑시키는 데 도사다. 특히 자살 암시를 통해 대전으로 오게 만들어 여성의 동정심이나 돌봄을 이끌어 성적으로 접근한다. 즉 진화한 제비인 셈이다.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적으로 무죄가 되기 쉽다.) 그래도 이를 문제화하여 불화를 일으킨 몇몇 여성들의 용기 때문에 문학계에 각성이 일어나고 추가 피해자를 줄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화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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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인의 딸이 회사에서 성희롱을 반복적으로 당했다. 딸이 집에 와서 울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엄마도 어쩔 수 없이 허용하려 했다. 난 반대했다. “그냥 넘어가면 딸도 상처만 커지고 직장도 구하기 힘들다. 소송을 하거나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여야 딸이 성장한다.” 마침내 딸이 회사 대표에게 성희롱 증거를 제시하고 문제화했다. 그 간부는 잘렸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근무지를 옮겨 일하게 되었다. 불화를 일으키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유가 유익하다.

불화를 일으키는 사상가, 불편한 가르침, 래디컬한 사유들이 더 도움이 되더라. 늘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강연자나 강사나 책은 사실 기적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주다. 상품화에 성공했다. 모두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가장 거짓된 자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꾸미고 숨기고 양념칠을 지나치게 하기 때문이다. 대개 강단 학자들이나 교수들이 그렇다. 할 말,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계에 선 학자들, 독립연구자들, 활동가, 학교를 뛰쳐나온 지식인들이 제대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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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질 하지 않는 이론, 우리 머리를 쥐어박지 않는 글은 별로다. 불을 던지러 온 예언자, 불화를 일으키는 현자, 시민들의 아우성과 행동, 갈등을 촉발시키는 래디컬한 사유를 다시 볼 일이다. 아, 물론 거대담론적 차원에서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걸로 따지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올챙이의 몸짓 말고. 불화를 일으키면 귀를 기울인다.

되돌아보니 불화를 일으킨 경우에는 언제나 인간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신사적으로 혹은 부드럽게 접근할 때 가볍게 알더라. 그래도 대개 착하게 굴었다. 하지만 굴욕을 강요하거나 부당하게 할 때면 목숨을 걸었다. 언제나 사과를 받아냈고 문제는 재발하지 않았다. 불화할 줄 아는 신체가 살아있다.

참 언론은 거짓과 불화한다. 철학은 권력과 불화한다. 종교는 미신과 탐욕적 세상과 불화한다. 예술은 상투성과 불화한다. 사랑은 거짓사랑과 불화한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불화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신의 어처구니없음과 탐욕과 자기 안의 독재자와 불화할 줄 알 때 내면의 평화가 깃든다. 불화하지 않으면 아주 작은 평화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글 황산/인문학 연구자·씨알네트워크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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