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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널리 알려진 얘기부터 해야겠다.

신라의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 날이 저물고 앞길을 볼 수 없는 밤에 이르러 잠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렵게 산속에서 움막집을 만났다. 종일 걸어 피곤이 쌓였기에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다. 원효는 새벽녘에 목이 몹시 말랐다. 잠자리 주변에서 바가지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물이 담겨 있는 것 같아 급히 마셨다. 물맛이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깨어나 새벽에 마신 물바가지를 살펴보니, 아니! 바가지라고 생각한 것은 해골이 아닌가?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감로수처럼 마신 것이다. 순간, 그는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우주적 진동으로 흔들렸다. 그 자리에서 원효의 마음이 환하게 열렸다. 세상의 이치에 대해 어떤 의심도 사라졌다. ‘심생즉종종법(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 온갖 작용과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이치를 확연하게 깨친 것이다.

그럼, 생각해 보자. 원효의 의식을 송두리째 흔든 깨달음의 원인과 조건이 어디에 있는가? 시신이 자리한 움막이라는 ‘공간’인가. 아니면 해골바가지와 그 속에 담긴 물이라는 ‘사물’인가. 만약 움막이라는 공간과 해골 물이라는 사물이 깨침의 ‘절대적 원인’이라면 그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건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공간과 사물은 그에 상응하는 절대적 결과를 ‘반드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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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에서 제2의 붓다라고 칭송받는, 우리에게는 용수보살로 알려진 그의 저서 <중론>에는 원인과 결과, 결과와 원인은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많은 비유를 들어 논증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를 살펴보자. 여기에 알맞게 자른 통나무가 있다. 이 통나무는 불의 조건인 연료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통나무는 ‘반드시’ 불의 ‘절대적’ 조건이 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통나무는 집의 기둥이나 도마로도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나무는 불의 조건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통나무에 불을 지피면 통나무는 불의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결과)과 연료(원인)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 연료에 의하여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하여 연료가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과가 조건 속에 미리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부연하자면, 결과가 발생할 때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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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 보자. 어떤 공간과 사물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결정적으로, 획일적으로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발생시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의도’와 ‘행위’로 결과가 발생한다. 그 결과에 따라, 그 결과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움막이라는 공간과 해골 물이라는 사물이 반드시 깨달음을 주는 원인이 되거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시는 자의 마음가짐과 해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평생을 진리추구에 정진한 원효의 ‘의식’의 흐름이 해골 물을 깨침의 계기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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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을 생각하면 대략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의식은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작용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새삼 말하거니와 어떤 명칭과 공간이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이미지와 인식을 만들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행위와 문화가 인식을 만든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면 그토록 욕을 먹는 검찰청을 명동성당이나 해인사로 옮기면 검사들의 의식과 문화는 달라질까? 또 탐욕에 사로잡혀 부당한 착취를 일삼는 사람이 소담한 집에 거주한다면 그 사람의 심성 또한 소담한 집에 걸맞게 변할 수 있을까?

거듭 말한다. 이미지와 인식은 공간의 이동과 명칭의 변경이 아니다. 정직한 마음, 거기에 부합한 규칙을 잘 지키고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갈 때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는 것이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지 않는다. 의지와 규칙이 인식을 만들어간다. 선한 마음과 문화가 공간 이미지를 만든다.

글 법인 스님 /실상사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