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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애지와 방철미가 8일(현지시각) 열린 2024파리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시상식을 마치고 퇴장하며 대화하고 있다. 파리/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임애지와 방철미가 8일(현지시각) 열린 2024파리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시상식을 마치고 퇴장하며 대화하고 있다. 파리/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남북의 분단 상황을 첨예하게 느낄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 무대다. 남북 관계가 좋으면 기자들도 신나게 북한 선수들을 취재한다. 질문의 수위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막히면 스스로 내부검열을 한다. 자칫 예민한 질문을 했다가 북한 선수들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산통 깨지기 때문이다.

8일(현지시각) 프랑스 롤랑가로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복싱 54kg급 입상자 기자회견에서 국내 취재진의 관심은 공동 3위로 동메달을 목에 건 남쪽의 임애지(25)와 북쪽의 방철미(30)의 관계에 쏠렸다. 둘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부터 친해진 사이이고, 이번 파리올림픽 선수촌에서도 “파이팅 하자”며 선전을 다짐한 바 있다.

하지만 메달을 걸어주고 국기 게양 등의 행사가 이뤄지는 이날 시상식에서 방철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다 같이 셀카를 찍을 때도 웃지 않았다. 공동취재구역을 지나갈 때도 방철미 등 북한의 일행은 냉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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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는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해야 하는 기자들을 위축시킨다.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답변 못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날 취재는 망하는 날이다.

정작 속으로는 둘의 친근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끌어내는 질문을 하고 싶은데, 빙빙 돌아서 주변적인 것을 묻게 된다. 한국 기자들이 수상 소감이나, 북한에서의 올림픽 준비, 메달을 집에 가져가면 누구한테 걸어주겠냐 정도의 중립(?)적인 질문을 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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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일본 교도통신 서울지국의 도카시 아키히로 기자가 꼭 듣고 싶은 얘기를 물어봤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말로 “임애지 선수가 시상식에서 (방철미를) 안아 주고 싶다고 했는데, 그렇게 했는가”라고 물었다. 임애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비밀입니다”라고 했고, 이때 방철미도 ‘동생’이 귀여웠는지, 아니면 ‘빵 터졌는지’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짝 웃었다.

8일(현지시각)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입상자 기자회견장 한 쪽에 북한 등 각 팀 관계자들이 보인다. 김창금 기자
8일(현지시각)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복싱 54kg급 입상자 기자회견장 한 쪽에 북한 등 각 팀 관계자들이 보인다. 김창금 기자

방철미는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했다. 남쪽이 아니라 3자인 일본 기자의 질문이라 덜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홍길동처럼 남북 선수들의 속 이야기를 일본 기자를 통해 들어야 하는 상황 자체는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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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자회견이 열린 프랑스 테니스의 메카 롤랑가로스의 대형 기자실 벽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다. “저널리즘은 접촉과 거리 둘 모두다.”(Journalism is both contact and distance) ‘르 몽드’의 창립자인 위베르 베브-메리가 한 말이라고 한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북한을 취재할 때는 이 균형이 완전히 깨져있다. ‘컨택트’ 해야 하는데, 오로지 ‘디스턴스’만 있다. 그 간극은 기자의 용기 없음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남북의 정치적 대립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파리/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