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빙자오(중국)의 셔틀콕이 라인 밖을 벗어나자, 안세영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포효했다. “낭만 있게 끝내겠다”는 결승 직전의 각오는 현실이 됐다.
5일(한국시각) 프랑스 파리 라 샤펠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 안세영(22)의 ‘낭만’ 스매시는 마침내 올림픽 포디움 가장 높은 곳에 꽂혔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방수현 이후 첫 배드민턴 단식 우승이다. 타고난 재능과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이룬 성과다.
안세영은 결승전까지 파죽지세로 올라왔다. 조별리그 2경기를 가뿐히 넘고, 16강을 부전승으로 통과했다. 8강전과 준결승에서는 ‘약속의 2게임’ 전략으로 1세트를 내준 뒤 2세트부터 압도적인 체력을 우위를 앞세워 철벽 수비로 상대를 압박해 승리했다. 8강 상대 야마구치 아카네(일본), 준결승 상대 그레고리아 마리스카 툰중(인도네시아) 모두 자신의 공 모두 받아내며 범실을 유도하는 안세영의 전략에 말려 코트 위에 드러누웠다.
체력 : 후반 갈수록 더 강해진다
안세영의 타고난 체력은 복싱 선수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배드민턴 동호인인 아버지를 따라 라켓을 잡은 안세영은 체력 부담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경기를 따내는 수비형 선수로 거듭났다. 한 경기당 코트 내 이동 거리가 10㎞에 달하지만, 안세영은 체력 싸움에서 상대를 앞섰다.
만 15살 나이에 참가한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 실업팀 소속 선수들을 모조리 꺾었다. 중학교 3학년 단식 선수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전승을 거둔 것은 한국 배드민턴 역사상 처음이었다.
연맹 추천이 아닌 선발전을 통해 중학생 나이로 최연소 배드민턴 국가대표가 된 그때가 2017년 12월이었다. 2021년 방영된 SBS 드라마 ‘라켓소년단’에는 중학생 배드민턴 국가대표 한세윤이 나오는데 안세영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었다. 한세윤은 우승한 뒤 안세영이 고등학교 때 했던 세리머니를 똑같이 재현했다.
어린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고 가족과 떨어져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생활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밤에 별을 보면서 울기도 했다. 고민을 털어놓을 또래 친구조차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견뎠다.
하지만,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는 첫 경기에서 0-2로 완패하며 ‘광탈’했다. 경험 부족이 컸다. 상대는 천위페이(중국)였다. 세계의 벽을 확인한 안세영은 “하루도 안 쉬고 (도쿄올림픽을) 준비하겠다”고 다짐했고 3년간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늦게 치러진 도쿄올림픽(2021년) 단식 8강전에서 천위페이를 만나 또다시 0-2로 졌다. 2게임 막판에 발목을 다쳐 응급 치료를 받고 코트에 나설 만큼 전의를 불태웠으나 결과는 ‘패’였다.
근성 : “그렇게 준비해도 안 되면, 더 준비해야지”
경기 뒤 눈물을 펑펑 쏟은 안세영은 “쉬는 날 없이 계속 훈련했는데 기대만큼 성과가 안 나온 것 같아서 너무 많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그렇다고 좌절할 안세영이 아니었다. 그는 “후회 없이 준비해서 이 정도의 성과가 나왔다. 그렇게 준비해서도 안 됐으니까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수비력에 비해 스윙스피드가 느리고 공격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안세영은 단점 보완에 나섰다. 그리고, 2023년 더 성장했고 세계 1위로 발돋움했다. 항저우아시안게임 결승 때는 ‘천적’ 천위페이를 꺾었다. 이후 꽃길이 예상됐으나 아시안게임에서 얻은 무릎 부상이 안세영을 내내 괴롭혔다. 1월 인도오픈에서는 허벅지 근육 부상까지 겹쳐 8강전을 기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전담 트레이너과 함께 재활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금메달은 그랜드슬램 달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퍼즐이었다. 안세영은 출국 전 “파리에서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임했고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마지막 퍼즐은 아시아선수권대회뿐이다. 이 대회는 올림픽보다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고, 2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있기에 안세영의 그랜드슬램 달성은 시간문제이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안세영. 이제 배드민턴은 ‘안세영 시대’다.
파리/장필수 기자 fe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