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멈추면서, 그녀도 멈췄다. 그녀의 완벽한 기술과 매혹적인 몸놀림을 정확히 4분7초 동안 아름답게 동반했던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가 끝나자 그녀 또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멈췄다. 퍼시픽 콜리시엄의 수많은 관중들이 기립해 손뼉을 치기 시작하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1분16초 동안 울먹거리면서 관중에게 화답한 뒤, 브라이언 오서 코치에게 가서는 좀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울먹거리는 소리가 화면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퀸 연아의 눈물!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멋있게 경기를 마치고 우아하게 울어야지, 이런 졸렬한 상황을 기획하는 선수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지극히 자연스런 격정의 폭발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눈물이, 점수가 발표되고 금메달이 확정된 다음에 터져나온 것이 아니라 연기를 마치고 나서 곧장 터져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나 힘들었고, 너무나 무거웠고, 너무나 길었던 시간의 터널을 마침내 벗어난, 순정한 눈물이었다. 계산되지 않은 눈물! 그녀는, 스무 살이지만, 아직은 소녀였다.

이번 겨울올림픽의 몇몇 장면들에서 더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중계와 보도가 있었다. 풍부한 정보와 섬세한 해설 대신 응원단장 같은 말과 개인의 종교적 신념까지 표출한 어느 해설위원도 있었거니와, 그 밖의 종목에서도 정보는 빈약했고 결정적인 장면에 대한 판단이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장면. 그녀가 4분7초간의 경기를 마치고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릴 때, 중계를 담당한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그 흔한 “대한민국!”이나 “확정적이에요!” 같은 공허한 감탄사를 자제했다. “그냥 느끼고 싶네요”와 “고맙습니다” 정도가 차분하게 흘렀다. 실제로 그 순간은, 그와 같은 순간이었다.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려는 스무 살 여인에 대해, 달리 필요한 감탄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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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황이 가능한 것은, 지난 몇해 동안 우리 모두가 김연아 선수에게 일정한 ‘감정이입’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김연아와 맺은 감정이입이란 ‘대한민국!’이라거나 ‘국위선양!’ 같은 강직된 구호만은 아니었다.

다른 맥락의 시선과 몰입이 있었거니와 우선 피겨스케이팅이라는, 바늘만큼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기술적 제약 속에서 우아한 몸놀림을 펼쳐내야 하는 종목의 특성이 있다. 힘과 속도라는 직선이 반드시 필요하되 그것이 수많은 회전과 손짓과 시선 처리 같은 곡선의 그릇 안으로 녹아들어가야 하는 종목이다. 헛헛하면서도 더러는 비루한 일상을 살아가기도 하는 우리에게 좀더 매혹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을 보여준다. 김연아가 중력을 뿌리치고 트리플 러츠를 시도할 때, 그 순간 우리 마음도 비상한다. 스포츠는, 비록 힘의 경연장이기는 해도,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관습과 제약을 벗어나려는 욕망의 실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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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중요한 것은, 한없이 지속될 것만 같은 매혹적인 비상을 위해 김연아 선수가(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선수들이) 긴 시간 동안 고된 훈련과 긴장을 견뎌내야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대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내면과도 일치한다. 삶은 거룩하지만 일상은 고단하다. 그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것, 나아가 좀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간절한 동경이 우리 내면에 있거니와, 김연아 선수의 숨가쁜 도약과 아름다운 비상과 격정에 사무친 눈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누구나 한줌씩 가지고 있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울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스포츠평론가 정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