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왼쪽) 작가와 황대권 작가.
허윤희(왼쪽) 작가와 황대권 작가.

코로나 시대 식물은 지친 삶을 치유하는 존재다.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이 식물의 의미를 되짚는 특별한 미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ㅁ(미음)의 ‘황대권-허윤희 2인전: 풀’. 생태운동가 황대권 작가와 자연주의 미술가 허윤희 작가가 이 전시의 주인공이다. 황 작가는 에세이〈야생초 편지〉(2002)에 수록된 풀꽃 그림 16점을, 허 작가는 멸종식물 그림 9점과 〈나뭇잎 일기〉(2018)의 나뭇잎 그림 76점을 선보인다.

‘풀’ 전시는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탄생한 풀꽃의 만남이다. 하나는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황 작가가 그린 감옥의 풀꽃이고, 다른 하나는 허 작가가 그림으로 되살려낸 산업사회 이후 사라져 가는 풀꽃이다.

황대권, 비름, 21 x 29.7cm, ballpoint pen, watercolor on wax paper, 1994.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황대권, 비름, 21 x 29.7cm, ballpoint pen, watercolor on wax paper, 1994.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황대권, 왕고들빼기, 21 x 29.7 cm, ballpoint pen, watercolor on wax paper, 1994.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황대권, 왕고들빼기, 21 x 29.7 cm, ballpoint pen, watercolor on wax paper, 1994.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지난달 29일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에서 만난 황 작가는 “〈야생초 편지〉의 원화를 처음 공개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책꽂이에 둔 이 그림들을 전시회에서 보니 (그림을 그리던) 당시 생각이 나네요. 독방에서 24시간 지내던 그때 교도관에게 미술 도구를 넣어달라고 했어요. 종이와 수채화 물감, 볼펜을 받아 감옥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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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미술 도구를 부탁했을까. 황 작가는 어릴 때 화가를 꿈꾸었을 정도로 미술을 향한 애정이 깊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살고 싶은 집 설계도를 그렸다는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미술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지명수배 중일 때에도 이젤과 물감을 챙겨가 “남한산성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그림을 그렸”다.

황 작가가 감옥에서 주목한 그림 대상은 야생초다. 구절초, 쑥부쟁이, 사철쑥, 괭이밥, 방가지똥, 왕고들빼기, 까마중 등이 그가 만난 ‘옥중 친구’다. “척박한 감옥에서는 풀이 자랄 수 없어요. 그런데도 그걸 뚫고 풀이 자라요. 그들의 강한 생명력에 대한 경애심이 생겼어요.” 야생초를 보며 생태와 생명에 눈을 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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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작가는 2008년부터 동네 산책을 하며 주변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나뭇잎 일기를 쓰고 그 기록을 모아 〈나뭇잎 일기〉를 펴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그때 김종철 선생님이 〈녹색평론〉에 촛불집회를 주제로 한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셨어요. 그 제안을 받은 뒤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당시 우리는 왜 이렇게 싸우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어요. 그럴 때마다 제가 사는 부암동 동네를 산책했어요. 고요한 나뭇잎을 보며 위로를 받았어요. 그때부터 나뭇잎을 그렸어요.”

허 작가는 나뭇잎을 그리며 ‘초록예찬자’가 됐다. 2008년 5월의 ‘나뭇잎 일기’에 이렇게 썼다. ‘녹색은 내게 권태롭고 지루한 색이었다. 화려한 꽃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그 평범한 색이 이렇게 싱그럽고, 풍부하고, 빛나는 빛깔인 것을 산을 다니면서 잎새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면서 느끼게 된다. 녹색은 은근하게, 천천히 자신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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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작가에게 식물을 그리는 것은 명상하는 것과 같다. “나뭇잎을 그릴 때 잡념이 사라지고 고요한 상태가 돼요. 그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고 새로운 힘이 생겨요. 자연이 품은 평화로운 에너지가 큰 위로가 됩니다.”

허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멸종위기 식물 그림을 그렸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생물 리스트에 있는 식물을 모델로 삼았다. “멸종위기 식물들은 모두 우리나라 야생화예요. 이렇게 예쁜 식물들이 사람들의 불법 채취, 개발로 인한 자생지 파괴, 기후 변화 등으로 죽어가고 있어요. 너무 안타까워요. 이들을 그린 그림에 죽음, 생생함, 삶에 대한 간절함 등을 담았어요. 그림의 물감이 흐르는 기법은 사라지는 생명에 대한 슬픔, 눈물을 표현한 것이에요.”

허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마치 “친구 초상화를 그리듯” 그렸다. “멸종위기식물의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렸어요. 요즘 드는 생각은 얘네만 사라지는 게 아니구나, 우리 인간도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구 감소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야기되고 있잖아요.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림들은 사라지는 우리의 초상화이기도 해요.”

풀을 사랑하는 두 작가를 이어준 건 상명대 조형예술학과 이인범 교수이다. 이 교수는 황 작가의 고등학교 미술 동아리 동기다. 황 작가는 이 교수가 어느 날 그가 사는 전라남도 영광으로 허 작가의 책 〈나뭇잎 일기〉를 보냈다. “그 책을 보고 허 작가가 전시하는 세종수목원에 가서 봤어요. 실물로 보니 책에서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제대로 전해졌어요. 허 작가가 나뭇잎 하나하나 그리면서 가졌던 감정, 느낌 하나하나 다가오는 듯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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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작가 역시 이 교수를 통해 황 작가를 알았다. “이인범 교수님이 〈야생초 편지〉와 〈나뭇잎 일기〉가 잘 어울린다고 황 작가님을 언제 한 번 소개해줄 거라고 하셨어요. 너무 기대되는 일이라 좋아했는데 그 말이 이번에 전시를 통해 성사됐네요. (웃음)”

허윤희, 나도풍란, 50 x 50cm, gouache on paper, 202.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허윤희, 나도풍란, 50 x 50cm, gouache on paper, 202.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허윤희, 나도풍란, 50 x 50cm, gouache on paper, 2021.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허윤희, 나도풍란, 50 x 50cm, gouache on paper, 2021. 프로젝트 스페이스 미음 제공

두 작가가 만든 전시 공간은 녹색의 상상력으로 꿈틀댄다. 황 작가는 “1인전이 아니라 2인전이라 서로가 부족한 것을 메꿔주고 공간에 뿜어내는 기운이 풍만해지는 느낌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허 작가의 작품을 보며 자극을 받았어요. 땅에 떨어진 작은 나뭇잎에 관심을 기울인 섬세한 마음이 전해졌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허 작가와 함께 식물 주제로 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여러 아이디어가 꿈틀꿈틀하네요. 다들 너무 반생명적으로 살아가니까 다양한 전시회 통해 우리가 무엇을 멸종시키고 있는지, 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네요.”

두 작가의 ‘풀’ 전시는 8월 6일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황 작가는 “이 전시에 오는 관람객들이 그림을 보고 ‘나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나 역시 전업 화가가 아니지만 이렇게 전시를 하잖아요. 데생 기초를 몰라도 대상에서 느끼는 것을 내 손이 가진 능력대로 그리면 돼요”라고 말했다. 허 작가도 전시에 오는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인터뷰 말미에 건넸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인데 이곳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어 갔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