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고가 패션 업체들이 한국과 중국에 주목하는 것은 두 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커져서이기도 하지만
국제적인 고가 패션 업체들이 한국과 중국에 주목하는 것은 두 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커져서이기도 하지만

지난 20~21일 서울 신라호텔에선 제2회 ‘콩데 나스트 럭셔리 콘퍼런스’가 열렸다. <보그>, <지큐> 등의 잡지를 발행하는 출판그룹 ‘콩데 나스트 인터내셔널’이 주최하고, 수지 멩키스 <인터내셔널 보그> 에디터가 주관한 이 행사는, 세계 유명 패션업계 관계자 500여명이 모여 ‘럭셔리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잠깐, ‘럭셔리’라니? 아무것도 안 해도 잘 팔리는 이런 브랜드 관계자들이 왜 굳이 극동의 좁은 나라 수도에 모였을까? ‘식지 않는 한류 열풍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곳이 서울이라서’라는 답은 진실의 일면일 뿐이다. 이틀 동안 콘퍼런스의 연단에 오른 30여명의 연사들은 ‘럭셔리를 가장 열망하는 곳, 가장 잘 팔릴 가능성이 높은 곳이 서울, 그리고 중국이라서’라는 또다른 답을 내놨다.

‘럭셔리=명품’의 신화

다시 잠깐, ‘럭셔리’(luxury)라니? 국립국어원은 2004년 신어 자료집에 이 단어를 실으면서 ‘보기에 값비싸고 호화로움’이라는 풀이를 달았다. 영어사전에서도 이 단어는 ‘호화로움, 사치, 사치품’ 등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럭셔리’를 이런 뜻으로 이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럭셔리’는 고급스럽고 가치있는 것, 비싸서 접근하기 어렵지만 잘 만들어 갖고 싶은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대개 ‘명품’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한국 사회에서 ‘럭셔리’가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이다. 언론자료 통합 검색 사이트인 ‘미디어가온’에서 검색해보면, 종합일간지에 ‘럭셔리’가 처음 등판한 것은 1995년 3월20일치 <동아일보>다. 이때의 ‘럭셔리’는 고가의 수입 자동차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였고, 이런 흐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패션 분야에서 ‘럭셔리’가 등장하는 건 1999년 가을부터다. 그전까지 ‘해외 유명 브랜드’, ‘세계적 유명 브랜드’ 등으로 부르던 럭셔리 브랜드를 ‘명품’으로 지칭하기 시작한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1990년 9월 갤러리아백화점이 명품관을 개장하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린 이 ‘해외 유명 브랜드’들은 10년 가까이 ‘과소비의 주범’이자 ‘부유층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비판받았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럭셔리’는 곧 ‘명품’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면서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것’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외환위기 탈출과 정보통신 등 벤처업계의 폭발적 성장, 주식시장의 호황 등으로 경제지표가 좋아지는 동시에 사회적 양극화와 계층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명품 판타지>의 지은이 김윤성씨는 책에서 “물건 가치에 비해서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비난하는 말”인 사치스럽다는 원래의 뜻 대신 “최고의 기술로 잘 만들었기 때문에, 내 취향에 맞아서 산다는 느낌”을 주는 ‘명품’이라는 단어가 통용된 것은, 대중의 판타지와 욕망을 부추기는 마케팅 덕분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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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가품 매출 35% 차지하는 중국중국·미국보다 면세시장 규모 큰 한국‘명품 대중화’ ‘명품 민주화’ 앞세워이윤 늘려온 패션업계엔 매력적인 시장

정말 그럴까? 장인정신과 역사를 강조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수십년 경력을 가진 가죽 장인이 한땀 한땀 손으로 바느질한 가방’ 하나가 세상에 나오려면 보통 2~3일이 걸린다. 대체 얼마나 많은 장인이 있어야 이런 가방이 한국과 중국 중소도시의 월급쟁이 어깨에까지 메일 수 있는 걸까? 모든 제품을 숙련공의 수작업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루이뷔통, 에르메스 같은 브랜드가 처음 생겨난 19세기, 이들이 왕족이나 귀족, 신흥 갑부 등 극소수의 한정된 고객만을 위해 제품을 주문생산하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극소수의 고객들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소비자가 구매하는 건, “개발도상국에 아웃소싱을” 하고, “조립공정 생산 방식으로 전환해 기계로 대량생산한” 제품이다. 업체들은 그저 “브랜드의 역사적인 유산과 수제술의 전통을 떠벌리며 자신들의 제품이 정통 명품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뿐이다.(<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

명품의 대중화?
루이뷔통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가방을 만드는 모습. 루이뷔통 제공
루이뷔통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가방을 만드는 모습. 루이뷔통 제공

<뉴스위크>, <워싱턴 포스트> 등의 패션기자 출신인 데이나 토머스가 쓴 책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을 보면, 럭셔리 브랜드들이 ‘명품의 대중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중산층으로까지 소비자층을 늘리기 시작한 건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부터다. 이 시기 패션업체 루이뷔통과 주류업체 모에 에네시가 합병해 탄생한 루이뷔통 모에 에네시(LVMH) 그룹은 이후 지방시, 겐조, 로에베, 펜디 등을 차례차례 합병하며 현재 60여개 브랜드를 거느린 세계 최대 럭셔리 업체가 됐다. 그 뒤를 이어 구치, 보테가 베네타, 생로랑 등을 보유한 케링 그룹, 카르티에, 피아제, 클로에 등을 보유한 리치몬트(리슈몽) 그룹 등이 등장해 럭셔리 업계를 재편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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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가격의 명품’(affordable luxury), ‘명품의 민주화’, ‘매스티지’(대중적인 명품) 등 어떤 수식어를 동원하든, 거대 자본이 시장에 뛰어드는 단 하나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다. 이들은 향수, 화장품, 선글라스처럼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제품을 속속 내놨고, 세계 곳곳에 화려한 매장을 열었다. 여행객을 노린 면세점, 이월상품을 싼값에 처리할 아웃렛에도 속속 입점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한국에도 럭셔리 브랜드가 진출했는데, 루이뷔통(1984년)과 에르메스(1985년), 샤넬(1986년)이 모두 차례로 면세점에 입점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당시 한국 시장 자체가 아니라, 한국을 여행하러 온 일본 관광객들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한국·중국 소비자를 잡아라

럭셔리 브랜드들이 한국과 중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렇게 시장을 확대해 이윤을 늘려온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면세점은 이들 브랜드에 대단히 중요한 시장이다. ‘럭셔리 콘퍼런스’에서 한국 면세시장을 주제로 발표한 컨설팅업체 매킨지의 에이미 김 파트너는 “지난 2년 동안 세계 주요 공항 면세점에서의 고가 브랜드 매출이 30% 증가했으며, 이는 온라인 매출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한국 면세시장은 2014년 기준으로 규모가 78억달러(약 8조9000억원)에 이르며, 중국(50억달러)이나 미국(38억달러)의 면세시장보다 훨씬 크다”고 덧붙였다. 해마다 늘어나는 중국인 관광객을 고려하면 이 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다. 2014년의 경우 롯데면세점에서 물건을 산 사람은 한국인이 20%인 반면 중국인은 70%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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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듯, 중국은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소비자’로 거듭나고 있다. <블링 다이너스티>의 저자이자 금융그룹 에이치에스비시(HSBC)의 애널리스트인 어원 램보그는 콘퍼런스에서 “2015년 전세계 럭셔리 매출의 35%를 중국이 차지했고, 10년 뒤엔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르사체의 최고경영자인 잔 자코모 페라리스는 “베르사체는 아시아 시장에서 5년 연속 10% 이상 성장했으며, 30곳의 매장이 있는 중국에서의 매출이 베르사체 전체 매출의 16%를 차지한다”며 “올해 9월엔 홍콩에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매장을 열 예정이며, 상하이에도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 예정이다. 중국에서 소비가 늘고 있어 (시장 전망을) 낙관한다”고 밝혔다.

그게 다일까? 한국과 중국에 매장을 늘리기만 하면 ‘욕망에 찬 소비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가방을 사고 구두를 살까? 수지 멩키스 에디터는 “도시마다 매장을 여는 게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본다. 그는 콘퍼런스에 앞서 기자들과 한 간담회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럭셔리 브랜드들이 한해 평균 25개의 매장을 열었지만, 프라다를 비롯해 적지 않은 브랜드의 매장들이 문을 닫았다. 이제는 어떤 매장이 실패하고 성공했는지 차근차근 원인을 분석할 때가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원 램보그는 “루이뷔통이 중국 소비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으면 사지 않겠지만, 너무 많이 유명해지면 소비자들은 다른 브랜드를 사려고 할 것”이라며 ‘럭셔리 패러독스’를 언급했다.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고가 브랜드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브이브이아이피(VVIP) 룸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대접받는 경험을 산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럭셔리 자본은 또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새로운 시장을 찾는다. 그래서 내년 봄 열리는 제3회 럭셔리 콘퍼런스의 개최지는 중동의 오만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있는 곳, 중동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돈이 몰려들고 있는 두바이에서 한 시간 거리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참고도서 <럭셔리 그 유혹과 사치의 비밀>, <명품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