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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사업자의 꿈, 예술로 열매 맺었네

등록 :2013-03-13 22:37

하제마을과 입주작가들.
하제마을과 입주작가들.
[매거진 esc] 라이프
작가 지원 스튜디오
1세대 경기도 파주
하제마을
내년이면 스무돌 맞아

공장 임대와 텃밭가꾸기로
노후 삶 꾸려가려던
약사 권창호씨
미술가들에게 개방하면서
주요 작가들의 산실로

“작품에 올인하는 많은 분들이 그곳을 거쳤어요. 김승영, 김창호, 김재홍, 김창겸, 홍순명 등등. 유근택(성신여대), 베른트(중앙대), 임택(덕성대) 등 교수도 세 명이나 나왔고요.”

경기도 파주시 창작스튜디오인 하제마을이 화제에 오르자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창작스튜디오란 미술작가들이 일정기간 머물며 안정적으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공되는 공간. 대개는 무료 또는 실비여서 꿈 많은 가난한 작가들한테 딱이다.

“1995년에 첫 작가가 입주했으니까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 창동 스튜디오보다 7년쯤 앞서죠. 쌈지나 영은 쪽 스튜디오도 그 뒤에 만들어졌죠. 국공립, 사립을 통틀어 국내 처음이라니까요. 그런데….” 이 관장이 뜸을 들였다. “그곳을 운영하는 분이 개인이에요. 권 박사라고, 파주에서 약국을 해요.”

하제마을의 주인이 약사라고? 그것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 파주에서 약국을 하는? 도대체 어떤 양반이기에, 무슨 생각으로, 무슨 돈이 있어 그런 돈 안 되는 일을 할까. 하제마을과 창립자인 권창호(61)씨에 대한 호기심은 순전히 세속적이었다.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파주시 중앙로 장안초원아파트 앞 정도약국을 찾았다. 파주시청과 금촌역을 잇는 중앙로는 많은 아파트와 상가를 거느린 메인스트리트. 아침 일찍 하제마을을 들러 일을 하고 왔다는 주인공은 작업복에서 흰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하제마을과 입주작가들.
하제마을과 입주작가들.
“25년 전 2000평 논을 메워 공장을 지었어요. 500평씩 쪼개 U자로 건물을 지었어요. 공장은 임대 주고 가운데에는 채소를 심으려고요. 임대료를 받으면서 노후에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어요.”

그런데 아침이면 어음할인을 해 달라는 입주업체 사장들이 약국을 찾아왔다. 송장과 함께 들고 와서 물건이 세관을 통관하면 금세 돈이 되니 그동안만 사정을 봐달라고 했다. 마음 약한 그는 부탁을 들어줬고 5년 동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어음이 쌓였다. “망해서 돈이 없다는데 어떡합니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돈을 더 벌기보다 마음 평온한 게 제일이라는 거죠. 그리고 땅이란 게 죽어서 떠메고 가는 것도 아니니 지주도 사실은 관리인이죠.”

마침 공장이 나가 빈 공간에, 지인 소개로 설치조각가 김승영을 들였다. 서른셋 노총각이었다. 작가들이란 지저분하고 술, 담배는 물론 마약까지 하는 것으로 알던 약사는 눈매 선하고 목소리 사근사근한 사람으로 고르기는 했어도 못 미더워 작업장을 찾아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 결과, 누가 옆에 왔는지도 모를 만큼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 사장들처럼 어음할인해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다.

공장이 빌 때마다 작가들을 맞았다. 김창호, 김재홍, 홍순명 등인데, 한눈팔지 않고 작업에 몰입하는 타입이다. 구태여 팔리는 작품에 연연하지 않아 가난한 만큼 순박했다. 결국 공장 세 군데만 남기고 모든 공간을 작가로 채웠다.

한번은 작가들 이야기를 엿들었다. “이게 얼마나 가겠어? 3, 4년 하다 말겠지.” 국가나 기업도 아니고 개인이 사비로 만든 공간을 공짜로 제공하는 게 쉬운가. 일시적인 변덕으로 추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세운 첫째 원칙이 제로베이스다. 공장 임대료로 건물 유지비와 재산세를 충당하고 전기·수도·인터넷삯은 작가한테 돌렸다. 일인당 월 10만원. 오래가자는 전략이다. 공장은 선별 임대했다. 직원이 많지 않고 소음, 먼지, 쓰레기가 적은 업종을 들이는 대신 임대료를 깎아줬다. 공장과 창작공간이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월 셋째 주말에 벌이는 울력. 작가들을 공동체로 묶어내는 구실을 한다.
매월 셋째 주말에 벌이는 울력. 작가들을 공동체로 묶어내는 구실을 한다.
두번째 원칙은 지원하되 간섭 않기.

입주 작가들은 기존 작가들의 추천을 받았다. 함께 생활해야 하는 만큼 토론에 부쳐 만장일치제를 택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들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길 경우 추천자가 책임지는 것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작가주의 작가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하제에서는 매달 셋째 주말에 울력을 한다. 모든 작가가 힘을 모아 공동의 일거리를 해치우는 것. 봄엔 배수로 정비와 나뭇가지 치기다. 여름이면 풀을 베거나 잡초를 뽑고, 가을이 되면 낙엽을 쓸고 수도파이프에 보온테이프를 감는다. 뜨악해하는 작가들을 언젠가 갖게 될 자기작업실을 관리하는 셈 치라고 설득했다. 내일을 뜻하는 순우리말 ‘하제’로 이름지은 것도 그런 연유다. 한나절 일이 끝나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세미나를 한다. 돌아가며 최근의 자기 작업을 설명하고 동료, 선후배의 의견을 듣는다.

그렇게 20년. 30여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2년을 기본으로 하는 여느 창작공간과 달리 필요한 작가한테 필요한 만큼 시간을 주는 까닭에 머무는 기간이 긴 편이다. 김창호 17년, 홍순명 14년, 김승영은 10년이다. 30~40대가 40~50대가 되어 하제마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됐다. 지금 하제에는 홍순명, 김창호, 김창겸, 김승영, 이승현, 박승훈, 김은숙, 송민철, 이윤진, 마저가 입주해 있다.

창립자인 권창호 박사.
창립자인 권창호 박사.
“가보면 알겠지만 저는 사람들한테 설치미술을 한다고 해요. 사람을 포함한 생체 설치미술이죠. 작가 개개인이 작업을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까탈스런 그들이 서로 부닥치지 않도록 궁합을 맞추죠. 작가들보다 큰 작품이죠. 하하.”

팔학골에 자리잡은 하제마을은 약국에서 차로 7~8분 거리. 회색 공장들 틈에서 산뜻하게 도색한 벽에 검은색의 숫자를 두른 건물들이 도드라진다. 정문을 들어가 문을 닫으면 U자 건물들 사이의 뜰이 고즈넉하다. 그리고 서쪽 1동과 5동 사이로 보이는 산 중턱에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무덤이 걸려 있다.

원래 하제마을 자리는 김수근이 건축아카데미를 지으려 사두었던 땅으로 그가 타계하면서 계획이 무산되면서 권 박사한테 넘어왔다고 했다. 묘소 아래에는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제약사 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어쩌겠어요. 운명이려니 해야죠.” 권 박사는 아들 용찬(28)씨한테 하제마을 관리 수업을 시키고 있다.

파주=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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