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배
서양배

어릴 때부터 오래된 정물화를 꼼꼼히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꽃과 열매가 흥미로워서다. 특히 서양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꽃과 과일이 어떤 종인지 알아내는 게 재미있었다.

그중 오랫동안 궁금증을 안겨주었던 과일이 있는데 그건 서양배다. 처음엔 그게 배라는 것도 몰랐다. 그림 설명에 배라고 적혀있는 걸 보고도 그림 속에 내가 아는 갈색의 동그란 배는 어디에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물방울 모양의 열매가 배일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채. 나중에 그것이 흔히 서양배라 불리는 배의 일종이란 걸 알게 되자 그때부턴 그 맛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다 유럽 시장에서 서양배를 직접 보게 되었고 바로 구입했다. 아삭하고 시원한 한국배와 달리 딱딱하고 풀내까지 나는 맛없는 그 배는 어릴 때부터 간직한 궁금증과 상상력에 더없이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한국 배꽃보다 더 탐스러운데…

2018년 가을, 미국 연구소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선임연구관님은 캠퍼스의 가장 멋진 언덕에 홀로 심겨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배나무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나중에 배가 열리면 먹어보라 하셨다. 나는 출근할 때마다 언덕 위에 보이는 배나무를 보며 연구관님의 얘기를 종종 떠올렸지만 겨우내 빈 가지로 있는 나무에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게다가 예전 기억 때문에 서양배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멀리서만 바라봐서 미동이 없는 것 같던 배나무는 3월이 되자 갑자기 꽃이 만발했다. 푸른 잔디 언덕 위에 빛나는 연둣빛 새잎과 하얀 꽃이 어우러진 모습은 정말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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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스소니언 식물 연구소 캠퍼스 언덕에 홀로 심겨 있는 배나무
미국 메릴랜드주 스미스소니언 식물 연구소 캠퍼스 언덕에 홀로 심겨 있는 배나무

나는 풀밭을 헤치고 처음으로 그 배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한국의 배꽃보다 크고 소담했다. 그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맛 좋은 열매를 기대하게 되었다. 어쩌면 전에 먹은 맛없는 서양배는 잘못 산 걸지도 모른다며. 종종 배나무 가까이 다가가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생기고 점점 커지는 모습을 관찰했다. 열매가 서양배 특유의 물방울 모양이 되니 기대감은 한껏 커졌다. 어느 가을날 드디어 완전히 익어 떨어진 열매를 손에 넣었다. 잔뜩 기대하며 열매를 베어 물고 씹기 시작했다. 그 배는 처음 먹어 본 서양배보다 더 고약했다. 맛없는 건 물론이고 모래처럼 씹히는 ‘석세포’(stone cell)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 식감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까마득히 잊고 있던 식물형태학 수업의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석세포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을까?

석세포는 배의 안쪽 씨앗 가까이에 있는 딱딱한 세포다. 한국배에도 씨앗 주변을 둘러싼 딱딱한 조직이 있어 그걸 도려내고 먹는데 그곳이 석세포가 많은 곳이다. 석세포는 리그닌이 축적되고 단단한 세포벽이 발달한 죽은 세포인데 열매뿐만 아니라 줄기나 잎에도 있다. 이런 죽은 세포들은 식물체의 형태를 만들고 지지하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식물에는 죽은 세포들이 살아있는 세포들과 섞여 있다. 살아있는 세포들을 위해 어떤 세포들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배의 씨앗 주변에 있는 석세포는 초식동물이나 물리적 충격, 건조로부터 씨앗을 보호해준다. 배는 석세포를 볼 수 있는 대표적 과일이다. 나는 연구관님에게 가서 배가 너무 맛이 없고 석세포가 가득하다고 했다. 연구관님은 ‘또 한 명이 걸렸네’ 하는 표정으로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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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배 맛없다” 하니 ”기다렸니?”

이후에 배꽃이나 배를 보면 매번 서양배와 관련된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몸서리쳐지는 이상한 맛을 떠올리며 영영 서양배와 친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년 뒤, 나는 이곳 연구소에 다시 왔고 어느새 또 3월이 되었다. 언덕 위 배나무엔 꽃이 어김없이 만발해 나를 설레게 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나는 또다시 희망을 안고 당장 마트로 달려가 서양배를 집어왔다. 세번째이니 이번엔 괜찮지 않을까? 사람들이 배를 사 가는 모습을 살펴보고 같은 배 한 봉지를 골라왔다. 그러나 그 배도 결국 나를 실망시켰다. 세번째라 배신감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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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연구소 언덕 위에 피어있는 꽃나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동료에게 배꽃이라 알려주며 가을에 석세포가 가득한 배가 열리니 먹지 말라 일러주었다. 연구관님이 먹어보라 권하시면 속지 말라고. 그러면서 어차피 서양배는 맛이 없는데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동료는 갑자기 “기다렸니?”라고 물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동료는 후숙을 시켰냐고 되물었다. 나는 감이나 아보카도도 아닌데 후숙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했다. 동료는 당연하다는 듯 “배도 아보카도처럼 기다렸다 먹는 거잖아”라고 답했다. 놀란 나는 과육이 말랑해질 때까지 일주일 넘게 기다렸다 드디어 한입 베어 물었다. 한국배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풍미가 가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섯개나 먹었다. 다음날 동료에게 내가 서양배에 완전히 빠져버렸다고 소리쳤다.

봄마다 배꽃을 보고 가을마다 배를 먹으면서도 나는 과연 배나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던 것일까. 인간이 키우는 배나무에는 3천종가량의 품종이 있는데 대부분이 서양배와 비슷하고 한국배처럼 둥글고 아삭한 품종이 더 적다. 후숙해서 먹는 부드러운 맛으로 배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더 많은 셈이다. 열매가 자라날 때 수분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로 많은 석세포가 생긴다. 석세포의 비중은 배의 상업적 가치를 좌지우지하기에 이것을 해결하려는 과학적 농법이 발달해왔다.

나는 잘 안다고 여겼던 식물에 대해 새로운 걸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고 반성한다. 배나무는 그중에서도 참 강렬했다. 나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배꽃이 지기 전에 언덕 위 배나무를 다시 만나러 갔다. 배나무 아래엔 누워서 배꽃을 감상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꽃 이름을 몰랐던 소녀에게 배나무라 일러주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마 그 나무는 영영 아무 말을 하지 않겠지만 비밀이 아주 많아요’라고.

글·사진 신혜우│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