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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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22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한 여성이 흉기에 여러 차례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집요하게 스토킹하며 폭력을 휘둘러 온 이혼한 전 남편 김아무개(48)씨였다. 김씨는 미리 가발을 준비하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피해자 차량에 붙여 위치를 파악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음날인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 피해자의 딸입니다’는 글이 올라왔다. “아빠는 절대 심신미약이 아니다.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한겨레>가 지난 4월 다뤘던 ‘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기획 시리즈 가운데 두 번째 기사(▶바로 가기 : ‘스토킹 남편’ 성폭행 신고한 날, 아내가 살해당했다)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국가가 여전히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다.
29일 밤 서울 강서경찰서 앞에서 피의자와 피해자의 둘째 딸(21)을 만나 엄마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김씨는 담담하고 침착했다. 가끔 천장을 보며 입술을 뜯기도 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가해자 김씨는 가족을 조종의 대상으로 보는 가정폭력범의 전형이었다. 의심하고 통제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구타 뒤엔 ‘미안하다. 사랑한다’ 빌었고, 구타하지 않을 땐 자해를 통해 가족을 괴롭혔다. 김씨의 인터뷰를 토대로 폭력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가족의 20여년’을 재구성했다.

■ 폭행과 협박 그리고 “사랑한다” 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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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구경 시켜줄게. 집으로 다들 모여’

2015년 2월 아빠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집에는 큰이모와 막내이모가 도착해 있었다. 그들도 아빠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온 가족이 모여 아빠를 기다렸다. ‘띠리릭~’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왔다. 옆에는 제주도 여행을 간다던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 얼굴은 주름이 다 없어질 정도로 퉁퉁 부어 있다. 끝이 아니었다. 칼을 들고 ‘죽여 버리겠다’ 협박했다.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막내이모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한 번 해봐. 어떻게 되는지 보자. 끝까지 보복할 거야.” 이모는 망설였다. 며칠 같은 몇 시간이 그렇게 공포 속에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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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해합니다. 어떤 심정인지 공감해요. 우리 서에서 얘기합시다.” 경찰은 아빠를 달래 경찰서로 데려갔다. 그렇게 끝이 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는 고작 2시간 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미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당장 데리고 오라며 난동을 부렸다. 그릇을 던지고 유리를 깨트렸으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자해는 아빠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행하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잠시만 떨어져 살아요.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상황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집으로 돌아갈게요.” 무자비한 폭행에도 엄마는 ‘이혼’이 아닌 ‘별거’를 요구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아빠의 경제 사정을 걱정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세 딸의 미래도 발목을 잡았다. 아빠는 ‘용납하지’ 않았다. 수십 년 폭행에 시달렸던 엄마는 이날 처음 아빠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우리 세 자매와도 떨어져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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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휴대전화로 ‘죽여버리겠다, 어디냐’는 메시지가 계속 도착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미안해, 아팠지, 내가 그렇게 때린 줄 몰랐어, 사랑해, 아픈 거 치료 잘하고, 다음에 보자’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엄마가 여기에 답변을 안 좋게 하면 곧바로 ‘너 죽여버릴 거야, 왜 카톡 안 봐, 답장 안 해, 죽여 버릴 거야’라고 협박했다가 또 ‘내가 왜 그랬지, 미안해, 내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치료 잘 받고 사랑해’라고 다시 용서를 빌었다. 협박과 용서는 반복됐다. 아빠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엄마를) 내 앞에 데려다 놔야 한다.’

■ 투신·흥신소·GPS까지…아빠의 추적

‘앞으로 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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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언니(23)에게 아빠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언니는 불길한 마음에 경찰에 신고했다. 위치 추적 끝에 아빠를 발견한 곳은 마포대교 위였다. 경찰이 도착한 사실을 확인한 아빠는 한강으로 뛰어들었다. 죽으려 작심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스스로 괴롭히는 게 아내 귀에 들어가면 나를 찾아오겠지.’ 그런 생각으로 투신 소식이 엄마 귀에 들어가는 걸 노린 ‘계획극’이었다.

투신까지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우리를 괴롭혔다. 이모와 할머니도 위협했다. 하지만 매번 엄마 대신 경찰이 현장에 들이닥쳤다. 엄마는 병원 치료 뒤 모텔과 원룸, 여성센터를 전전했다. 혹시나 아빠가 알아볼까 봐 범죄자 마냥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엄마가 2015년 말 ‘미아삼거리’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세 자매 가운데 아빠와 말조차 섞지 않을 정도로 혐오가 강하고, 심리적으로도 가장 불안해했던 막내 동생은 어떻게든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오랫동안 ‘도망자’ 생활을 한 엄마도 외로웠다. 그런데 동생과 엄마가 함께 생활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2016년 1월1일, 아빠가 엄마 앞에 나타났다. 흥신소를 통해 동생 뒤를 밟아 엄마의 거처를 알아낸 것이다. 한 손엔 식칼이 들려 있었다. “널 원망해. 나는 널 용서하지 않아.”

엄마는 다시 숨었다. 우리는 미아삼거리 때처럼 아빠가 우리를 통해 엄마를 찾아낼까 싶어 엄마와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번호도 몰랐다. 정기적으로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고, 대화가 끝나면 방을 삭제했다. 하지만 매번 아빠는 엄마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일가족 살인사건 등을 다룬 기사를 주기적으로, 여러 개 보냈다.

그런데 일도 그만두고 엄마만 쫓았던 아빠가 잠잠했다. 협박 메시지도 더이상 도착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빠와 마주하지 않은 채 2년이 흘렀고, 올해 3월 엄마는 어렵사리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에 정착했다. 가족들의 경계심도 느슨해졌다.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엄마는 올해부터 가족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네 아빠가 불행하길 원하지 않아. 너희는 아빠와 잘 지내야 한다.” 엄마는 좋게 좋게, 모두가 행복해지길 꿈꿨다.

엄마의 바람과 달리 아빠는 변하지 않았다. 모두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노려 엄마를 찾아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엄마의 차량에 붙였고, 가발을 쓰고 숨어 있다가 엄마가 집 앞에 도착한 순간 흉기를 휘둘러 엄마의 목숨을 빼앗았다. 불안에 잠을 설치던 엄마가 몸을 움직이려 수영을 하고 오던 길이었다.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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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았지만, 가정폭력인 줄 몰랐다

“짐승도 맞으면 말을 잘 듣는다. 너희는 맞아도 말을 듣지 않으니 개보다 못하다. 그러니 더 맞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어릴 적 아빠의 거친 행동이 가정폭력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리의 세계는 그저 가족 안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맞을 때마다 다른 집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폭행이 ‘훈육’이라고 했다. 폭행의 첫 기억은 유치원 때다. 태권도 띠나 벨트로 손목을 묶어놓고 때리기도 했다. 밥에 콩이 많이 들어간 것도 ‘훈육’의 빌미가 됐다. 그러곤 이내 연고를 들고 와 발라주곤 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나는 별명이 독사다. 거머리다. 한 번 문 타깃은 절대 놓치지 않기 때문에…”라고 했다. 자기 말이 곧 법이라고 했다. 폭력에 젖어들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 탓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이런 거로 경찰에 신고해도 될까? 다른 집도 이러지 않나? 아빠가 때린다고 무조건 폭력인 건 아니잖아.’ 혼란스러웠지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저 이혼가정이 부러웠다. 마음속엔 증오가 자리 잡았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못했다. 아빠에게 맞지 않기 위해 가식적인 행동을 했다. 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약자의 아부였다.

■ 밖에선 한없이 친절했던 아빠

아빠는 집에선 ‘악마’였지만 밖에선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꼭 엄마를 데리고 나갔다. 엄마 입에 밥을 떠먹여 주고 “나는 이 사람 집에서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한다”며 가정적인 남자인 양 행동했다. 하지만 집에선 왕이었다. 끊임없이 통제했다. “난 아빠야. 내가 너희를 낳아줬는데 너희는 왜 내 말을 따르지 않는 거야.”

엄마는 동창 모임조차 가지 못 했다. 외출했다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어디 갔다 왔어. 여자가 왜 이렇게 늦게 돌아다니냐’고 했다. 엄마가 공원 한 바퀴 돌고 온다고 하면 ‘그래, 알았어’ 했다가도 엄마한테 전화를 수십 통 했다. 엄마가 뒤늦게 받으면 “너 어디야”라고 캐물었다가 엄마가 공원이라고 답하면 곧 “그래? 나도 같이 운동하러 나왔어”라며 집착하지 않는 척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에게 아빠 탓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왕따야? 왜 친구가 없어?” 우리는 엄마가 친구가 없어 외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빠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건 2015년 2월 폭행 뒤 엄마가 이혼을 결심하고 나서부터다. 노래방에서 아빠가 마이크 줄로 목을 조르고, 화장실로 도망친 엄마가 몇 시간 동안 화장실 문을 잠근 뒤 “살려 달라” 빈 것도 뒤늦게 알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당신의 불화가 알려질까 두려웠다. 한 사람으로서도, 한 명의 여성으로서도, 엄마로서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 “그저 빌 뿐”…우리 곁엔 경찰도 없었다

아빠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무릎 꿇고 비는 것뿐이었다. 법은 있었으나 가족을 보호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질 뿐이었다. 위반 시 500만원 이하의 벌금만 내면 됐다. 아빠는 법의 허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살인을 저질러도) 심신미약 감형으로 6개월만 살고 나오면 돼.” 아빠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매일 아침 문을 열 수가 없다. 아빠가 구속된 지금도 문 앞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두려움에 잠시 망설였다. 우리는 피해자의 딸인 동시에 살인자의 딸이기도 한 탓이다. 하지만 아빠의 계획대로 사건이 정리되는 건 더더욱 싫다. 생전에 엄마가 느꼈던 공포심을 아빠가 사회에 나오게 된다면 우리도 계속 느껴야 한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10월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아빠는 절대 심신미약이 아닙니다. 사회와 영원히 격리해 주세요.”

“엄마는 허망하게 떠났지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속해서 가정폭력 가해자를 감시하는 제도가 마련되고 가해자가 심신미약이나 반성으로 감형되는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명 말하는 것보다 힘을 모아서, 탄핵 때도 촛불 시위해서 바뀌었듯이 여러 사람 목소리를 내는 게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요.”

29일 둘째 딸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집회에 참석했다. 엄마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촉발된 ‘가정폭력 대응 시스템 쇄신’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딸은 손팻말로 얼굴을 가리고 구호를 외쳤다.

“가정폭력 범죄를 좌시하는 국가가 가해자다.”

황춘화 박윤경 기자 sflow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