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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심드렁했는데… 어느새 물개박수 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등록 :2017-02-13 10:08수정 :2017-02-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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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17 광장의 노래]
4부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설계도 ① 시민집권 프로젝트-민주주의를 상상하다
박유리 기자의 ‘정책배틀’ 체험기

배심원단은 방청객 아닌 결정주체
복면가왕처럼 배심원 설득하려는
두 명의 전문가 패널이 토론하면
실시간 문자투표로 승패를 가른다
2016년 광장의 촛불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다음 대통령으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무엇’을 바꿀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과 선거가 다가오면서 다시 관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치권이 알아서 개혁하고 후보를 정할 테니 시민은 투표나 하라’는 것이다. “죽 쒀서 개 줬다”는 탄식이 쏟아졌던 1987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시민이 주인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한겨레>는 사회혁신 프로젝트 단체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등과 공동으로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정책배틀’을 기획했다. 정책배틀을 지원하기 위한 스토리펀딩 ‘헬조선 리모델링 해볼까요?’도 진행하고 있다. 정책배틀은 박근혜 탄핵 이후 대한민국의 개혁과제를 토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정치놀이 한마당이다. 정치개혁, 검찰개혁, 민생해법 등 세가지 분야에서, 분야별로 두가지 개혁 방안을 맞세워 경쟁하는 방식이다.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시민정책배심원단이 양쪽 전문가가 내놓은 정책방안을 심의하고 최종 투표를 통해 더 나은 방안을 선택한다. ‘1987~2017 광장의 노래’ 4부 1회와 2회에 걸쳐 ‘정책배틀’을 지상 중계한다.

‘우리 민주주의 우리가 만든다.’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정책배틀’에 참가한 시민정책배심원단이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모바일로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중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정책투표를 마친 뒤 휴대폰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우리 민주주의 우리가 만든다.’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정책배틀’에 참가한 시민정책배심원단이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모바일로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중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정책투표를 마친 뒤 휴대폰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민주화된 것은 4·19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시민들의 거친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논리에 의해 이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27:8. 무대 뒤 대형 화면상 숫자는 한동안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2시에 서울 홍대입구역이 웬 말인가.’

“촛불 혁명이라는 이 시기는 반드시 일정한 물리적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도로는 늘 예측 밖이다. 출퇴근, 주말과 주중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도로에 갇힐 각오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지난 4일 토요일 오후의 도로 역시. 약속보다 늦은 오후 2시10분, 택시에서 내렸다. 홍대입구역 출구마다 어마어마한 인파를 쏟아냈다. 사람들을 뚫고 ‘미디어카페 후’ 문을 열었다. 이미 행사장엔 50명이 빼곡히 앉아 있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의자에 몸을 대충 구겨 앉았다. 27:10. 화면상의 숫자가 바뀌었다.

“87년 6월 항쟁의 주체 세력, 그때 대학생이었습니다.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 준비가 부족했던 거죠. 결국 시민이 6월 항쟁을 이뤘음에도 성과는 당시 민정당, 5·18(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주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둔자 성향이 강한 사람은 적어도 1주일에 하루의 반나절은 자기만의 동굴에 조용히 있어야지, 적어도 토요일 낮엔. 혼자 중얼거렸다. 무대 앞에 선 전문가 패널은 마이크에 대고 힘주어 말했다.

“프랑스 혁명처럼, 대부분 헌법은 혁명의 성과물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만들지 못하면 또 한 세기를 후회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 그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27:12. 숫자가 또 바뀌었다. 불과 5분 만이다. “두 자릿수가 됐어요. 균형이 맞아야 재밌잖아요. 저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치킨을 먹을까, 피자를 시킬까.’ 일요일 오후에 하는 고민처럼요.”

사회자는 대형 화면을 보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4표를 끌어올린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의 얼굴은 뿌듯해 보였다. 맞은편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최태욱 교수는 못내 아쉬운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정책배틀’에 참가한 시민정책배심원단과 박유리 기자(오른쪽 셋째)가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을 주제로 조별토론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정책배틀’에 참가한 시민정책배심원단과 박유리 기자(오른쪽 셋째)가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을 주제로 조별토론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오른쪽을 봐도, 왼쪽으로 둘러봐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휴대전화를 열었다. 사회혁신 프로젝트 단체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따라 ‘정책배틀’ 웹페이지로 접속했다. 딴 세상이 열렸다. 무대에 오른 두 명의 전문가 패널, 최 교수와 박 소장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웹페이지에서 저마다의 말을 쏟아냈다.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할 대의구조-선거제도를 먼저 개선하고 국민의 깊은 논의를 통해 개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김아무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이면, 선거제도 당연히 바뀌는 부분 아닌가요?’(이아무개) 뭘 써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 다섯 글자를 썼다. ‘바꾸자, 세상.’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중 우선순위를 따지는 ‘정책배틀’. 나는 배심원이다. ‘어, 이게 아닌가?’ 반대쪽 주장을 들을수록 생각에 불확실성이 커졌다. 배틀에 참여하기 전 사전 투표에선 ‘선거제도 개혁’을 선택했었다. 손은 어느새 ‘개헌’ 버튼을 눌렀다. 대형 화면에서 내 얼굴 사진과 이름이 왼쪽 ‘선거 제도 개혁’에서 오른쪽 ‘개헌’으로 옮겨갔다. 개헌 쪽에 숫자가 한 개 늘었다. 웬걸, 재밌는데? 토요일 낮에 인간 지옥 홍대입구역이 웬 말이냐며,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던 나는 어느덧 물개박수를 치고 있었다.

두 패널의 발표가 끝나자 배심원단의 질문이 쏟아졌다. 동시에 손을 드는 이가 많았다. 사회자는 난감해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분 먼저.” 이런, ‘정치 덕후’들인가.

“저런 방향의 개헌, 선거 개정 다 동의할 듯합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요. 그런데 저게 가능할까? 지루한 상황이 지속될 것 같거든요. 반대하는 저항은 어떻게 설득할지 질문드립니다.”

“선거 제도 개혁 말씀하셨는데, 비례대표에서 ‘대표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요?”

질문이 이어졌고, 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합의제 민주주의 가기 위해 개헌이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데 과두제(소수의 사람 또는 집단이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체제) 개헌으로 갈 위험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 당 그대로에서 권력구조만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등으로 바꾸면 지역 정당 보스들이 과두 체제 형성할 가능성 굉장히 높죠. 자기들끼리 장관 나눠 먹기 하고. 노동을 위해, 소상공인 위해, 청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지역 이익 강고히 하기 위해서요. 두 번째, 헌법에 명시된다고 바로 생활 개선으로 오지 않습니다. 명시됐다고 보장됩니까? 법제화해야 합니다. 여성의 권리, 녹색권리, 법제화하지 않으면 실생활과 아무 관련 없습니다. 법제화, 누가 합니까? 정당정치, 입법 통해서 법과 제도로 정책으로 나옵니다. 촛불 민심을 놓치기가 너무 아까워요. 진짜 개헌은 어려워요. 얼마나 많은 의제가 있습니까? 기본권 강화? 어디까지 가고 어디서 멈출 겁니까? 선거법은 국회에서 반만 동의하면 통과됩니다. 법률 개정사항이기 때문에. 순서대로 하자, 이 말씀 드리고 싶어요.”

사회: 교수님, 짧게, 짧게.

정책배틀의 모든 과정은 정해진 시간이 있다. 단 몇 분 안에 몇 표씩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최태욱 교수: 아, 아, 알겠습니다.

박 소장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전 시민운동이 집회였다면 이제 우리가 국민투표권, 국민발안권, 국민소환권을 가지는 것으로, 합법적 제도를 통해 국민의 힘을 관철할 때, 국가는 국민 무서운 것을 알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걸 실천하고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지 ‘저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맞은편 최 교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와, 웃음이 쏟아졌다.

대다수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시민은 구경꾼, 방청객, 들러리다. 정책배틀에서 시민 배심원은 패널들의 승패 결과를 좌우하는 주인공이다. 정책배틀을 현실로 가져온다면? 시민이 정책을 만드는 주체다. 전문가들은 주인공인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짧은 시간 안에 한 단어, 한 문장을 효율적으로 취사선택해 말한다. 표를 얻기 위한 그들의 말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나도 허리를 곧추세우게 됐다.

토론은 확신이 아닌, 혼돈을 준다. 우리가 가졌던 신념의 문을 두드리고 흔들어놓는다. 원래 가졌던 생각에서 물음표투성이가 비눗방울처럼 하늘로 올라간다. 몽실몽실 질문이 떠다닌다. 질문은 다른 세계와 부닥치며 쾅, 소리를 낸다. 파열이다.

#토론해도 소용없어?

조별 배심원단 심의를 앞두고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보니 최 교수와 시민 두 명이 서서 대화를 나눴다.

“아이러니하게 국회의원들 스스로 스펙 쌓으려고요. 대통령 인사권으로 국회의원 그만두지 않고 입각하는 방법을 열어놓는다는 게 현 국회 수준입니다, 정권 떠나서. (행정부와 입법부가) 서로 견제해야 하는데. 그리고 제가 봤을 땐 개헌안이 없습니다. 정말 하고자 한다면 민주당, 국민의당 초안이라도 나와야 하는데요. 시기가 중한 게 아니라 안이 하나로 모여야 하는데.”

“시민사회에서 만든 안하고, 이른바 유력 의원이 만든 안은 있는데 당 차원 안은 없죠.”

사전 투표에서 선거 제도 개혁을, 실시간 투표 때 개헌으로 선회했지만, 불확실한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제왕을 폐하면, 공간이 생기므로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순 이론이에요. 그런 나라 하나도 없어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의원내각제 택한 영국, 호주, 캐나다 이런 나라가 왜 아직도 양당제인지 설명이 안 돼요.” 최태욱 교수의 이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른 배심원 의견을 들으며 생각은 또 바뀔 수 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배심원단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배심원 심의 시간이 다가왔다. 입이 바짝 말랐다. 평소 내 주위 대다수는 진보다. 그러나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저 사람) 보수적이야”라는 말을 “(저 사람) 별로야”라는 말과 등가로 쓰거나, 보수나 보수의 주장 또는 노인 세대는 덮어놓고 논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거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을 교정 대상으로 보거나, 얼마나 해박한 지식과 깨어 있는 사고를 가졌는지를 늘 확인받아야 하거나. ‘이런 진보’에 피로한 상태였다.

4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배심원단은 8명. 물론 배심원은 대부분 진보 성향일 것이고 개헌이냐, 선거 제도 개혁이 먼저냐는 정확하게 진보와 보수로 나뉠 문제도 아니다. 그렇기에 ‘전쟁 같은 토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선거 제도 개혁 쪽이 우세했다. 2:6. 생각이 정리되진 않았지만, 개헌 쪽에 서기로 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정당도 그렇지만 정당들이 지역, 마을 단위로 들어가서 일상적으로 토론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질문드리고 싶은 게, 중앙선관위가 2015년 2월에 비례대표를 100석으로 늘리라는 제안을 했는데도 (정치권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잖아요. 벽이 두꺼운 거죠. 우리가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요?”

“지난해 11월28일 중학교 2학년생들이 원주경찰서에 집회 신고한 거 아세요? 단신으로 기사 났는데. 진짜인가 싶어 경찰서 전화했더니 맞대요. 아파트 단지 안에 애들이 모이는 거죠. 그 친구들이 사회인 되면 어마어마하게 변할 거예요.”

“만 18살 선거권 보장해야 해요. 15살까지 줘도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힘드니까. 그리고 여성 할당제가 이뤄져야 해요. (정당법상) 권고 사항이라서 안 지키는 정당들도 있단 말이에요. 지금 사회적 소수자,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공천받을 수도 없고 자금도 없어요. 이거 개선이 돼야 해요.”

배심원 심의가 두 쪽으로 나뉘어 가열차게 진행되진 않았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처럼 촛불이 바람에 흩어져 허망하게 꺼지지 않고, 개헌이든 선거제도 개혁이든 성과로 이뤄져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배심원 심의가 끝나고 전체 배심원단 50명의 최종 투표가 시작됐다. 결과는? 33:17. 사전 투표와 같았다. 배심원도 패널도 잠시 멍. 혼돈에 빠졌다.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토론해도 소용없단 결과 아녜요?”

두 패널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학자가 필요 없다는, 쓸데없이 왔단 거 아녜요? 하하.” 어떤 배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장 바꾸신 분, 손들어보세요.” 서너명쯤 될까? 결과는 허탈했지만, 정책배틀 누리집 댓글창에는 ‘이후’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속 올라왔다.

“이런 토론장이 많이 생기고 담아내는 곳이 있으면 합니다. 건의입니다. ㅎㅎ”(김아무개) “광화문에서도 몇천명이 참여하는 토론 기대해요!”(홍아무개) “이런 토론장이 활성화되길!”(윤아무개) “이런 게 민주주의.”(박아무개)

사실, 박아무개는 나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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