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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페미니스트 시국선언 “‘여성’을 팔지도, 비하하지도 말라”

등록 :2016-11-26 20:21수정 :2016-11-26 20:58

30여개 여성·성소수자·장애인단체들
26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앞 집회
“국정 파탄 책임 묻고 혐오도 넘어야”
“‘여성’이라는 프레임으로 그들의 죄를 희석시키거나 ‘여성’이 문제라며 왜곡하려는 행위를 규탄한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만연한 여성 비하와 가부장적 체제에 기댄 권력의 카르텔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이 나왔다.

30여개의 여성단체, 여성주의 모임, 성소수자 단체, 장애인 단체, 개인적인 선언자들 150여명은 26일 오후 2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이제 우리는 더 큰 싸움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박 대통령의 국정 파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편 여성 비하와 성차별, 성폭력에도 맞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날 시국선언에 함께한 단체·모임들은 강남역 10번출구, 건강과 대안 젠더건강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노동당 여성위원회, 다산인권센터, 동덕여대 여성학 동아리 WTF,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 불꽃페미액션, 사회진보연대, 서울인권영화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성적소수자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여성주의 춤 동호회 스윙 시스터즈,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 장애여성공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의당여성주의자모임-Just’ Feminist, 정의당 이화여대 학생위원회,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글로컬페미니즘학교, 페미당당,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양대 반성폭력 반성차별모임 ‘월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희망을 만드는 법 등이다.

여성이라서? 여성의 사생활이라서?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여성 모임 ‘강남역 10번 출구’는 시국선언문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시작으로 정재계의 수많은 기업과 인사들이 얽힌 불법적 커넥션이 하루가 다르게 드러나고 있다”며 “이들은 민주주의 헌정 질서 위에 군림하며 304명이 목숨을 잃었던 국가적 재난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경영권 세습과 국민의 미래를 거래했고 그들의 왕국을 경영했다”고 비판했다.

또 이번 국정 농단 사태 직후 ‘강남 아줌마’ ‘암탉’ ‘병신년’이라는 혐오 발언을 통해 급속히 번져나가는 여성·장애인 비하, 성차별 문제 또한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언론이 ‘특종’이라며 내놓은 가십들, 개그코너 풍자, 하다못해 대통령의 변호인까지도 당사자들의 여성성을 비꼬아내어 성적 프레임으로 비난받도록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회에서 시민들 또한 “희화화되고 왜곡된 ‘여성성’으로 이 사태를 심판하는 작태가 만연하다”며 이들은 덧붙였다. 여성 비하와 성차별적 발언에 더해 “온갖 소수자 혐오”를 갖다붙이며 박근혜 정권 심판의 언어가 “장애인 비하, 청소년 비하로도 뻗어나가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정의당 이화여대 학생위원회는 “입으로는 부패정권타도를 외치며 손으로는 옆에서 행진하는 여성의 신체를 추행하는 사람들, 시위에 나가서 성추행을 하고 오겠다고 낄낄대는 사람들. 그들은 박근혜와 최순실의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줌마’ ‘미스 박’ ‘암탉’ 등으로 부르면서도, 이명박은 ‘아재’ ‘미스터 리’ ‘숫쥐’ 라고 부르지 않는다. 남성 대통령은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조롱당한 적이 없으나, 여성 대통령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조롱의 대상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이화여대는 정유라를 부정하게 입학시킨 곳이기도 했지만 또한 학사문란에 반대하며 투쟁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말(정유라가 이화여대생이라며 희화화하는 말)이 나온 순간, 이화여대에는 ‘여자의 학사문란’만 남았고 ‘여성의 투쟁’은 없어졌다. 여성이 배제된 혁명과 여성이 배제된 정의는 과연 누구의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들은 “여성의 투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 놓인 동지이며 여기 있다고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곳에 나왔다”고 밝혔다.

이날 여성들은 박 대통령의 직무 유기, 여러 밝혀지지 않은 여러 의혹들을 “여성의 사생활”이라며 회피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건강과 대안 젠더건강팀’은 시국선언문에서 “대통령의 변호를 맡은 유영하 변호사는 ‘대통령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 말했다”며 “항노화를 위한 주사제와 의약품, 불법 시술, 밝혀지지 않는 세월호 7시간까지 감히 ‘여성’의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용시술이 여성의 사생활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기만적이고, 모욕적인 치사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건의료정책에서는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6년 5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응급피임약을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존치하기로 결정한 점에 대해 “우리의 재생산건강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어떻게 팔팔정과 비아그라를 (청와대가) 사들이는 노력만 못하냐”고 꼬집었다. 이에 덧붙여 “차움병원과 박근혜의 ‘의료게이트’에서 싸워야 할 것은 박근혜와 1% 의료민영화 정책”이라며 “지금도 추진하고 있는 모든 의료 민영화 정책을 폐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최순실·정유라·장시호 등 국정 농단의 핵심 인물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사달이 벌어졌고 여성이 대한민국을 망친 것처럼 회자되는 현실 인식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주의 춤 동호회 ‘스윙 시스터즈’는 “남자가 할 정치를 여자에게 한번 맡겼더니 나라를 망쳤다고 여자는 다시는 정치하면 안된다고 한다”며 “대한민국이 헌정유린 상태가 된 것은 돈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물질만능주의 때문이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혐오, 비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승자독식주의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또한 “페미니즘에 무지한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비판 세력이 여성혐오라는 감정의 정치를 더 이상 동원하지 말 것도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이 게이트는 대통령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며 “박근혜를 ‘순결하고 희생적인 여성’이라는 기표로 만들어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하려 했던 가부장적 젠더체계와 이에 기생하는 경제·정치·사법 권력 카르텔이 만들어낸 사건임에도 비판의 목소리는 여성비하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스스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 자임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그간 박근혜 정권의 여성인권이 후퇴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노동당 여성위원회는 “18대 대통령의 임기 4년 동안 한국의 성 격차지수는 2012년 108위에서 2016년 116위로 하락했다. 성별 임금격차는 임기 내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컸다.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의 복직투쟁이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패소했고, 몰래 카메라와 여성혐오범죄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으며 보건복지부는 낙태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다 반발에 못 이겨 원상복귀했다”고 밝혔다.

불꽃페미액션은 “당신은 준비된 여성대통령이 아니었다”며 “수천만 여성들의 삶을 비정규직으로 몰아갔으며 여성의 안전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대통령은 필요없다. 우리는 여성주의 대통령을 원한다”고 밝혔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는 시국선언문에서 “박근혜의 카르텔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각자도생의 삶을 파고들어 혐오를 부추겨왔으며, 군사적 긴장과 동맹에 기대어 끊임없이 불안을 야기해왔다. 그들은 허울뿐인 ‘여성대통령’을 상징으로 내세웠으나 여성들의 삶은 더욱 열악해졌다. 우리는 바로 그들이, 민중을 자신들의 탐욕과 특혜를 위해 길들일 개, 돼지로 여기고, 세월호 참사로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공동정범임을 똑똑히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정권을 넘어 체제에 주목한다. 이 파탄의 본질은, 비단 하나의 정권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을 지닌 소수가 다른 생명들을 자원으로 삼아 성장하는 가부장적 체제에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이제 우리는 더 큰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와 가부장적 권력집단의 카르텔을 종식시키고, 그들이 야기한 파탄에 명백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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