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62) 전 국가정보원장의 변호인은 26일 공판에서 “북한 및 종북세력에 대응한 사이버 활동은 국정원의 고유 업무”라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검찰 조사에서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 등의 작업을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행자’는 불법성을 시인하는데 ‘지시자’는 발뺌하고 있는 셈이다.
원 전 원장 쪽 이동명 변호사가 검찰 공소사실을 부인한 취지는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은 국정원의 고유 업무이기 때문에 원 전 원장의 지시 여부 및 인과관계를 논의할 필요도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원 전 원장이 지시했다는 관련성도 부인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 김하영(29)씨가 지난해 12월 발각된 뒤 조직적으로 국정원이 댓글 등을 삭제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원 전 원장 쪽 주장은 ‘자기모순’에 가까운 궤변이다. 국정원의 정당한 업무라면 은폐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업무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게 맞다.
국정원이 은밀하게 작업한 사이버 활동을 시종일관 은폐하려 한 것 자체가 위법한 행위라는 의식이 있었던 정황이라는 점에서 원 전 원장 쪽 주장은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다. 더군다나 변호인 주장대로 ‘정당한 활동’이라면 원장으로서 당연히 지시를 내릴 의무가 있음에도 지시를 내리지 않은 꼴이 된다.
검찰이 법정에서 공개한 내용을 종합하면, 김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민주당 관계자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복구 불가능한 방법으로 자신의 노트북에 담긴 187개의 파일을 삭제했다. 또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은 인터넷사이트 댓글 의혹 사건 발생 직후 자신들이 인터넷에 작성한 글을 광범위하게 없앴다. 포털 등 주요 인터넷사이트에선 다수의 아이디가 탈퇴했다. 인터넷사이트는 물론 트위터에 가입할 때도 외부 일반인 조력자들을 동원해 차명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지난해 9~12월 ‘오늘의 유머’(오유) 게시글에 대한 찬반 클릭 가운데 유독 10월 한달 동안 클릭수가 급격히 감소하는데, 이는 오유 운영자에 의해 국정원 직원들의 활동이 적발됐기 때문이라고 검찰은 설명했다.
검찰은 이날 원 전 원장이 국정원법에 엄격히 규정된 국내 직무 관련 범위를 넘어서 북한이 아닌 우리 국민을 상대로 대북심리전을 했다며 사례를 들었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10월21일 전 부서장 회의에서 “인터넷 종북좌파 세력을 다 잡아 우리가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법상 북한의 선동에 대응한 국내 보안정보 수집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방송통신위원회 및 국방부, 수사기관(범죄 혐의가 있을 경우)에 전달하는 게 적법하다. 그럼에도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일반 국민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쳐 정치·선거 개입을 하는 것은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벗어났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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