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엉덩이가 무겁길래
그냥 공주인 줄 알았더니
시댁에서 조우한 어느 명절날
주방을 ‘금남구역’ 만들면서
내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이번엔 다산의 여왕이 될 기세
손주를 염원하는 시부모와
동서의 관계는 날로 돈독해졌고
난 어느새 사사건건 비교당하는
맏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어라,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안 일어나네?’
밉상이 아닐까 의심한 건 그때부터다. 5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다. 도련님은 결혼할 사람이라면서 형과 형수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녀를 대접하기 위해 부엌에서 종종거리다 보니 뭔가 좀 불편한 느낌이 엄습해왔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영향일까. 보통 이런 상황에선 그녀가 “제가 뭣 좀 도울까요?”라고 예의상 물어줘야 하는 거고, 내 쪽에선 “아직 손님인데 앉아 있어요, 호호” 하는 게 맞는 거 아님? 그러나 그녀는 ‘절대’ 엉덩이를 마룻바닥에서 떼지 않았다. 밥을 먹고 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할 때까지. 도대체 왜?!
며칠 뒤 도련님의 처가 식구들과 우리 식구가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나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그쪽 장모님은 무슨 말을 하실 때마다 추임새처럼 “우리 공주가…”라는 말로 시작하시는 게 아닌가. 푸하하~아악. 그녀는 공주였던 거다. 아아. 나는 그때 처음 예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시월드’의 갈등은 고부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밉상이라는 확신이 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가 생기고 나서 첫 명절이 돌아왔다. 휴가를 길게 낼 수 없었던 나는 추석 하루 전날 시댁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 형님 이제 오시는 거예요?” 그녀는 시댁 현관에서 여유롭게 나를 맞이했다. 며칠 전만 해도 우리는 그날 오전에 시댁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런데도 하루 일찍 명절 준비의 ‘현장’에 와 있었던 거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구나 싶었다. 카카오톡으로 했던 약속을 들이밀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집안 분위기는 이미 맏며느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부랴부랴 부엌에 투입된 나는 또 한번 경악했다. 원래 “전은 시장에서 사오는 게 어떨까요?”라는 말을 꺼내려던 차였다. 가뜩이나 회사일로 몸이 파김치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급적 부엌일을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동그랑땡을 부치려고 자기 집에서 미리 준비해 온 반죽을 꺼내자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반죽의 양은 엄청났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추석 차례상에서 ‘옵션’에 불과한 동그랑땡을 부치는 데만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넘쳐났던 동그랑땡은 차례를 치른 뒤 경로당으로 보내졌다.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됐다. 그녀는 뭐든 나와 먼저 상의하는 법이 없었다. “아주버님~ 나가 계세요. 부엌에 안 들어오셔도 돼요.” 명절 음식 준비를 돕겠다며 부엌에 들어오려던 남편도 가차없이 제지당했다. 그동안 큰아들이 부엌 출입을 하는 게 못마땅했던 시어머니도 냉큼 “그래야지” 하며 힘을 실어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알고보니 그녀는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공주였다. 나이는 나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30대 초반인데도 사고방식은 개화기도 넘기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녀의 꿈은 ‘내조의 여왕’이다. 보수적 성향에 집안일이라고는 손도 대지 않는 시동생도 그런 그녀를 매우 흡족해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직후부터 지금까지 죽 맞벌이로 살아왔다. 내조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집안일도 정교하게 배분했다. 남편이 요리를 하면 내가 설거지를 하고,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면 내가 물걸레질을 하는 식이었다.
이런 차이를 시댁에서 인정받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시어머니가 점차 그녀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너무 두껍잖아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데” 등등 그녀의 온갖 타박을 받던 남편은 결국 부엌을 등지고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여우짓’에도 능했다. 이를테면 친정엄마가 해준 게 뻔해 보이는 음식들을 버젓이 자기가 해온 것처럼 자랑질을 한다거나 요리를 좀 한다는 핑계로 주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설거지는 교묘하게 나에게 미루는 식이었다. ‘공주’답게 그녀는 힘든 일을 직접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명절 연휴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설거지를 한 적이 없다. 식사를 마칠 때가 되면 으레 뭔가 다른 일을 만들어냈다. 아아, 신이시여! 차라리 저에게 곰 같은 동서를 내려주시는 게 나았을 것을.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는 ‘출산’에 임하는 태도 역시 극과 극을 달렸다. 집안의 장손인 아버님에겐 형제분이 전혀 없으셨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늘 본인이 아둘을 둘이나 두신 걸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신다. 당연히 며느리들도 ‘대를 잇길’ 간절히 바라셨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는 일인가. 아이를 딱 하나만 두기로 철석같이 약속한 우리 부부는 딸 하나를 낳고선 출산 활동을 접었다. 하나 더 낳으라는 시부모님의 성화도 해가 갈수록 옅어졌다.
반면에 조선시대 여인네의 기질이 다분한 그녀는 목적의식이 분명했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드리겠노라고. 첫딸이 돌이 되기도 전에 둘째를 임신한 그녀는 결국 지금 ‘딸딸이’ 엄마가 됐다. 그래도 아들을 향한 그녀의 출산 행진은 계속될 예정이다. 처음엔 이런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가 나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그러나 손자를 염원하는 시부모님과 그런 염원에 순응하는 그녀의 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고, 나는 어느새 ‘나쁜’ 며느리로 전락해 있었다.
명절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비교를 당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그때 이후인 것 같다. 비교는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본인의 가사활동을 일일이 시어머니에게 보고하고 그걸 다 듣고 난 시어머니는 “너도 이렇게 해보면 어떠니”라며 나를 다그치신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녀의 보고 내용은 시어머니를 흡족하게 만드는 것이 많다. 틈만 나면 시동생에게 보양식을 챙겨 먹이고 몸에 좋다는 비타민제를 내민다는 이야기는 시어머니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회사일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하는 내가 따라가려다간 가랑이가 찢어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그녀와 소원하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어머니는 늘 동서와의 주기적 전화연락과 만남을 ‘강권’하신다. 조금이라도 교류가 뜸했다는 게 들통나면 “여자들끼리 잘 지내야 형제들끼리 우애도 돈독해지는 법인데… 쯧쯧” 하시며 혀를 차신다. 안 당해본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으리라. 정나미가 뚝 떨어진 동서와 친하게 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 돌아갈래~. 홀며느리 시절로!
이름을 밝히길 꺼리는 서울의 한 맏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