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OO동 박홍우 판사 아파트 앞에서 경비원 김씨가 사건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부러진 화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경비원과 현장 출동 경찰 인터뷰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 근무하는 경비원 진술 번복 “부러진 화살 없었는데…”
여전히 같은 아파트에 근무하는 경비원 진술 번복 “부러진 화살 없었는데…”
석궁 사건을 영화화한 <부러진 화살>이 뜻밖의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박홍우 당시 부장판사가 맞았다는 ‘부러진 화살’의 행방이 다시 한번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에 <한겨레>는 ‘부러진 화살’과 관련된 증인들을 찾아 나섰다.
가장 핵심적인 증인은 박 판사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 김아무개(67)씨. 그는 박 판사와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와의 몸싸움을 처음 목격하고 싸움을 뜯어말렸으며, ‘부러진 화살’을 수집해 경찰에 넘겨준 인물이다. 그는 5년 전 재판(2007년 3월21일)에 출석해 “박 판사가 작대기(부러진 화살)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고, ‘어디 다치셨냐’ 물으니까 (박 판사가 화살을) 갖고 있으라고 넘겨줬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를 찾는 건 의외로 쉬웠다. 그는 여전히 박 판사 아파트를 지키는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난 25일, 해가 진 어둑한 밤. 그는 서울 송파구 한 아파트의 1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기자와 만난 김씨는 재판 당시와 다른, 뜻밖의 주장을 펼쳤다. 부러진 화살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판사님을 구급차에 실어 보내고 나서 계속 현장에 머무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그게 경찰이었는지 누군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내게 찾아와서 삼분의 일쯤 끝이 떨어져 나간 화살을 찾으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없어졌다고요. 그래서 내가 한참을 찾았어요. 끝내 못 찾았지만.”
#5년 전과 다른 경비원의 진술
대체 어찌된 일일까. 5년 전 재판에서는 박 판사로부터 부러진 화살을 건네받았다고 진술했던 김씨가 이제와서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김 전 교수가 조준해서 화살을 쐈다”고 밝혔지만 정작 그가 쏴서 박 판사를 맞춘 화살이 없다. 이 화살촉에는 박 판사의 혈흔이 묻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박 판사가 석궁을 맞았다면 결정적 증거가 된다. 그러나 재판부는 화살의 분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이 미궁에 빠진 핵심적인 이유다. “5년전 일이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날(2007년 1월 15일 저녁 6시 30분께) 저녁 지하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아파트 1층 로비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뛰어나와 보니 박홍우 판사와 어떤 사람(김명호 전 교수)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어요. 이 둘을 떼어 놓고 나서 보니 박 판사가 왼쪽 아랫배를 움켜 쥐고 있더라고요.” 이번엔 두 번째 핵심증인으로, 당시 최초 출동했던 송파경찰서 잠실지구대 이아무개 경위를 찾아나섰다. 그는 현재 인근의 다른 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씨는 5년 전 부러진 화살과 나머지 화살 2개를 현장에서 수거해 아파트 입구 앞 화단 옆에 놨다고 진술했었다. 현장에 출동한 이 경위가 이 화살 3개를 수거했다. 그런데 경찰이 검찰에 증거품으로 제출한 화살은 부러진 화살 1개와 멀쩡한 화살 2개가 아닌, 멀쩡한 화살 3개와 추가로 화살케이스에서 발견된 화살 6개(총 9개)였다. 즉,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져 혈흔 감정을 한 범행 증거품에는 박홍우 판사가 맞은 ‘부러진 화살’이 없었다는 말이다. 화살 케이스에 있는 나머지 화살 개수를 경찰은 6개로 파악했지만 김 전 교수 쪽은 7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초 출동 경찰 “화살은 모두 멀쩡했다” 이 경위는 26일 기자와 만나 수집해 온 화살 3개는 모두 멀쩡한 화살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위는 “내가 수거했던 화살은 분명 멀쩡한 화살 3개였다”고 말했다. “부러진 화살을 수거했다”는 5년 전 경비원 김씨와 “멀쩡한 화살 3개만 수거했다”는 경찰, “부러진 화살이 없어져서 누군가 뒤늦게 찾으라고 지시해왔다”는 현재의 경비원 김씨.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경비원 김씨는 지금 “박 판사가 정확히 내게 어떤 화살을 건네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물러서고 있지만 재판에 증인으로까지 출석해 부러진 화살의 존재를 언급했던 그다. 그에게 “어떻게 기억이 안날 수 있냐”고 물었으나 “5년 전 일을 어떻게 세세히 기억하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괜히 나만 또 판사님한테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김씨는 당시 상황을 분 단위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 시간가량 기자와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이 실제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기억을 하지 못했다.
답답한 대화가 오고 가던 중 밤 9시께 지금은 의정부지방법원 법원장이 된 박홍우 판사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부인과 함께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 판사에게 재빨리 다가가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부러진 화살의 행방이 묘연해 증거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미안합니다” 한 마디만 간단히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10여초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박 판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괜히 나만 또 판사님한테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김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눈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27일 박 판사의 어머니에게 확인할 게 있어 김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박 판사 어머니는 석궁에 맞은 옷을 경찰에게 건네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5년 전 재판에 출석해 “부러진 화살을 건네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지금 와서 왜 뒤집는지도 다시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전화를 끊어버리며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를 피했다.
김명호 전 교수를 항소심부터 변호한 박훈 변호사는 수사기관의 증거 조작 가능성을 의심한다. 화살에 맞았다는 박홍우 판사의 진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찰이 박 판사가 화살을 석궁 케이스에서 꺼내 검찰에 제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박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혈흔이 묻은 끝이 뭉툭한 부러진 화살은 증거 조작을 할 수 없지만, 정상적인 화살은 석궁 케이스에 들어 있던 화살 7개에서 1개를 빼내면 쉽게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석궁 전문가 “경찰이 소설을 썼다”
경찰 수사 초기 석궁관련 수사를 도운 석궁전문가 고아무개씨는 “경찰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과 함께 석궁 실험도 함께 했다.
“1.5m 앞에서 정상적으로 화살을 쏘면 목표물을 15cm 정도 관통합니다.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1.5m 앞에서 쏘아도 내복, 조끼, 와이셔츠를 입힌 돼지고기에 6.5cm 정도 관통합니다. 그러나 불완전 장전 상태에서 (김 전 교수가 쏜 것처럼) 석궁을 아래 방향으로 조준하면 화살은 발사 되지 않고 흘러내립니다. 박홍우 판사를 맞출 수가 없어요. 수사하던 경찰이 소설을 쓴 겁니다. 제가 이런 부분을 경찰에 충분히 설명을 해줬는데 경찰은 수사 기록을 거꾸로 써놨더라고요.” 사건 당시 박 판사의 상처를 봤다는 사람은 경비원 김씨가 유일하다.
경찰은 당시 “김명호 전 교수가 박홍우 판사 1.5m 앞에서 조준해 석궁을 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고씨는 박 판사의 화살이 조준해서 쏜 화살의 상처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를 경찰에 설명했지만 경찰이 검찰에 제출한 수사자료에는 거꾸로 써 있었다는 게 고씨의 설명이었다.
경찰은 김씨의 석궁이 일명 ‘메뚜기’로 불리는 격발장치가 마모돼 시위와 방아쇠를 순차적으로 당기는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우연히 발사될 수 있는 불량제품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인정했다.
#김명호 전 교수 “법원이 주도하고 검·경이 조작한 사건”
김명호 전 교수는 26일 <한겨레>와 만나 “석궁사건은 법원이 주도하고 검·경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이 박홍우 판사의 옷도 조작해 증거로 제출했을 수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혈흔을 의도적으로 조작했거나 옷에 난 화살 구멍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박홍우 판사가 화살에 맞았다면 그가 입고 있던 모든 옷에 난 화살 관통 구멍에 혈흔이 묻어 있어야 하지만 와이셔츠에 난 구멍에는 혈흔이 없다. 또 모든 옷에는 왼쪽 아랫배에 구멍이 나있지만 양복 상의는 가슴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점도 이상하다.
현실적으로 박홍우 판사가 집으로 올라갔다 내려온 10~20분 사이 옷에 구멍을 냈을 가능성은 높지않다. 김 전 교수 쪽은 경찰을 의심한다. 옷은 박 판사가 병원에 실려간 뒤 수시간 후에 경찰이 수거했다. 2007년 1월16일 오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옷이 보내졌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뒤 길게는 12시간 후 옷이 수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찰이 박홍우 옷에 조작 구멍을 냈다는 것은 김 전 교수 쪽의 추정일 뿐이다. 어떤 경찰이 박 판사의 옷을 수거해 검찰에 제출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인도 불가능하다. 검찰은 재판부에 “어떤 경찰이 옷을 수거했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재판부는 검찰의 설명에 아무 문제를 삼지 않았다. 역시 미궁으로 빠졌다.
경비원 김씨는 기자에게 “박 판사의 어머니가 피묻은 옷을 빨았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경찰에 제출된 박 판사의 옷이 사건을 겪은 그대로의 상태로였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국과수는 이 혈흔이 모두 “동일 남성의 것”이라고 통보했다. 박홍우 판사의 것이라고 단정 지어 통보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김명호 전 교수 쪽은 항소심에서 혈흔 감정 신청을 했지만 재판부는 기각했다.
김명호 전 교수 쪽은 박홍우 판사의 자해 가능성도 의심한다.
사건이 벌어진 시각은 2007년 1월15일 저녁 6시 30분께. 저녁 6시35분께 경비원 김씨 등이 사건을 목격한다. 곧 바로 경비원 김씨는 구급차를 부르고 경찰에 신고한다. 박 판사는 저녁 6시40분께 옷을 갈아 입으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간다. 저녁 7시께 다시 아파트를 내려와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떠났다.
따라서 김 전 교수는 “박 판사가 집에 들어간 10~20분 사이에 왼쪽 아랫배에 자해를 하고 내려왔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비원 김씨는 반박한다. 김씨는 기자와 만나 “박 판사가 집으로 올라가기 전 왼쪽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기에 ‘어디 다쳤냐’고 물은 뒤 살펴보니 속옷에 동그랗게 피가 묻어 있었다. 상처가 난 것 같기에 내가 직접 구급차를 불렀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잠실지구대 이 아무개 경위도 “저녁 7시가 막 되기 전 현장에 도착했는데 박 판사가 7시 정각 즈음 아파트에서 내려오는 걸 봤다. 10~20분 사이에 자해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김 전 교수는 19일 기자를 만나 “어쩌면 몸싸움을 하다가 화살이 우발적으로 발사돼 최악의 경우 박 판사의 배를 스치고 지나갔던 게 아닌가 생각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스치고 지나간다고 해도 멍이 들거나 하지 그런 상처가 날 수 없다고 해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 “증거조작 단정 어렵다” VS 김명호 전 교수 쪽 “물 타기 판결”
대법원은 2008년 6월 12일 김명호 전 교수에 대해 4년 징역형을 확정하며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수사기관이 범행현장에서 증거물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였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피고인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거물을 수사기관이 일부러 폐기 또는 은닉할 이유가 없으므로 이를 증거조작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피해자의 비명을 듣고 현장에 바로 온 목격자들은 서로 몸싸움 하던 피고인(김명호)을 피해자(박홍우)로부터 격리시킨 다음 옷을 들추니까 시뻘겋게 피가 묻어 있어서 경찰과 소방서에 바로 신고했고...(중략)...피고인 주장처럼 피해자가 스스로 자해를 할 시간이나 기회를 갖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와이셔츠의 혈흔이 육안으로 잘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는 속옷과 내의에서 다량의 출혈흔적이 확인된다는 사실의 증명력이 훨씬 우월한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은 2006년 11월 10일께 석궁을 구입한 다음 1주일에 1회 정도 60, 70여발씩 석궁을 발사하는 연습을 하였고, 2006년 12월 28일부터 이 사건 범행일까지 사이에 약 7회에 걸쳐 피해자의 거주지 부근을 찾아가 거주지 및 귀가시각을 확인하였는데, 피고인 주장처럼 단지 위 피해자에게 겁을 주려고 하였을 뿐이라면 위와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훈 변호사는 재판부가 동문서답하며 물 타기 판결을 했다고 주장한다.
“(김명호가) 석궁을 들고 갔고 집을 사전답사했다는 것과 (박홍우가) 석궁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가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리고 석궁 연습을 하는 사람은 모두 살해 의도가 있는 겁니까. 알 수 없는 동문서답으로 물 타기 수법을 쓰고 있는 겁니다. 석궁 들고 판사 집을 찾아가 협박을 한 것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석궁에 맞지도 않은 것을 맞았다고 주장하면서 그걸 상해죄 등으로 징역 4년을 때리니 분노가 치솟습니다. 분명한 건 박 판사가 석궁에 맞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부러진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김 교수 유죄 확신 경비원도 “그때 깔끔하게 못해서…”
당시 수사를 했던 검찰과 피해 당사자인 박홍우 판사는 모두 입을 닫아 반론을 들을 수 없었다. 1심에서 김명호 전 교수를 유죄로 확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한 백재명 검사는 이 사건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상주지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겨레>는 백 지청장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당분간 언론과 접촉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전해 왔다. 당시 초기 수사를 맡았던 이희성 전 송파경찰서 형사과장은 이후 구례경찰서장 등을 지낸 뒤 2011년 12월 31일자로 퇴직한 상태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명호 전 교수는 1심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증거신청이 계속 기각당하자 “이건 개판 재판이다”고 말했다. 박홍우 판사에 우호적인 사람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왜 그때 판결을 말끔하게 못해서 지금까지 뒷말이 나오나요. 그 판사들 다 잘라버려야 해요.” 김 전 교수의 유죄를 확신하는 아파트 경비원 김씨의 말이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검찰 증거로 제시된 구멍이 뚫린 옷들. 와이셔츠(위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에는 구멍은 있으나 구멍 부분에 혈흔이 없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5년 전 재판에서는 박 판사로부터 부러진 화살을 건네받았다고 진술했던 김씨가 이제와서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김 전 교수가 조준해서 화살을 쐈다”고 밝혔지만 정작 그가 쏴서 박 판사를 맞춘 화살이 없다. 이 화살촉에는 박 판사의 혈흔이 묻어있어야 하기 때문에 박 판사가 석궁을 맞았다면 결정적 증거가 된다. 그러나 재판부는 화살의 분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이 미궁에 빠진 핵심적인 이유다. “5년전 일이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날(2007년 1월 15일 저녁 6시 30분께) 저녁 지하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아파트 1층 로비에서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뛰어나와 보니 박홍우 판사와 어떤 사람(김명호 전 교수)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어요. 이 둘을 떼어 놓고 나서 보니 박 판사가 왼쪽 아랫배를 움켜 쥐고 있더라고요.” 이번엔 두 번째 핵심증인으로, 당시 최초 출동했던 송파경찰서 잠실지구대 이아무개 경위를 찾아나섰다. 그는 현재 인근의 다른 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씨는 5년 전 부러진 화살과 나머지 화살 2개를 현장에서 수거해 아파트 입구 앞 화단 옆에 놨다고 진술했었다. 현장에 출동한 이 경위가 이 화살 3개를 수거했다. 그런데 경찰이 검찰에 증거품으로 제출한 화살은 부러진 화살 1개와 멀쩡한 화살 2개가 아닌, 멀쩡한 화살 3개와 추가로 화살케이스에서 발견된 화살 6개(총 9개)였다. 즉,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져 혈흔 감정을 한 범행 증거품에는 박홍우 판사가 맞은 ‘부러진 화살’이 없었다는 말이다. 화살 케이스에 있는 나머지 화살 개수를 경찰은 6개로 파악했지만 김 전 교수 쪽은 7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초 출동 경찰 “화살은 모두 멀쩡했다” 이 경위는 26일 기자와 만나 수집해 온 화살 3개는 모두 멀쩡한 화살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위는 “내가 수거했던 화살은 분명 멀쩡한 화살 3개였다”고 말했다. “부러진 화살을 수거했다”는 5년 전 경비원 김씨와 “멀쩡한 화살 3개만 수거했다”는 경찰, “부러진 화살이 없어져서 누군가 뒤늦게 찾으라고 지시해왔다”는 현재의 경비원 김씨.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경비원 김씨는 지금 “박 판사가 정확히 내게 어떤 화살을 건네줬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물러서고 있지만 재판에 증인으로까지 출석해 부러진 화살의 존재를 언급했던 그다. 그에게 “어떻게 기억이 안날 수 있냐”고 물었으나 “5년 전 일을 어떻게 세세히 기억하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홍우 판사와 김명호 전 교수 사이 실랑이가 벌어졌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사진 허재현 기자
박홍우 판사가 석궁 화살에 맞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검찰 수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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