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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상식이 범죄가 되는 사회, 우상을 깨고 이성을 깨우다

등록 :2010-12-05 10:16수정 :2010-12-05 20:36

리영희
리영희
리영희 선생 별세, 진실 위해 싸운 선생의 한평생

지식이 범죄이던 야만의 시대에 자유와 책임 실천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

지난 5월 위중한 중에도 딸에게 구술한 <한겨레> 창간 22돌 격려 메시지에서 리영희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자신의 퇴임사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이 19세기 말 풍자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 말을 한 장군을 존경하진 않는다며 그는 “20여년 전의 상황과 같은 험난한 현실”이 다시 찾아왔는데도 “여러분과 동석하지 못함을 몹시 슬퍼한다”고 했다.

그가 ‘야만의 시대’라 했던 한국 현대사의 미몽을 깨운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1999년 <연세대학원신문> 조사 등)이요, 그를 두려워하고 미워한 자들에겐 ‘의식화의 주범’이었던 리영희는 마침내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이성이나 지성은커녕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됐던 대한민국에서랴.”(<대화>, 2005년)

40년 전에 리영희는 상식조차 범죄가 되는 이 땅의 현실을 ‘조건반사의 토끼’에 비유했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중공(中共)’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 등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조건반사의 토끼들. 1970년대 한국사회에 강력한 지적 충격파를 가하며 리영희의 존재를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첫 저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 재수록된 ‘조건반사의 토끼’(1971년 발표)에서 그는 토끼장을 벗어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의 글에서 ‘중공’ 대신 ‘북한’을 넣어보라. 지금 우리는 과연 그 토끼장에서 벗어났을까. 그 글을 쓸 무렵 그는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가담했다가 언론사에서 두 번째 강제해직을 당한 터였다. 이듬해(1972년)에 박정희 유신독재체제가 시작됐고, 그 3년 뒤 <전환시대의 논리>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발표해야 했던 코페르니쿠스처럼 역시 ‘가설의 해설서’임을 서문에 적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1977년에 나온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토끼장에 갇히기를 거부한 그를 반공법의 이름으로 2년 간 감옥에 가두는 구실이 된다. 그리고 1980년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로 구속, 그해 다시 교수직에서 해직(1976년에 1차 해직), 1984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반통일적 교과서 시정연구회 지도사건으로 구속, 1989년 <한겨레> 창간기념 북한취재단 방북기획 건으로 구속 등 모두 아홉 번의 연행과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1천 일을 넘긴 세 번의 징역살이…. 그 후유증으로 그는 쓸개를 떼어내야 했고, 만성기관지염으로 고생했으며, 성한 이빨이 없었다. 2000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마비가 돼 고생하다 최근 간 기능 악화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1968년 소설가 선우휘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자마자, 외신(국제)부장을 맡고 있던 리영희를 난데없이 조사부장으로 발령냈다. 1년 뒤에는 직제에도 없던 심의부라는 걸 만들어 다시 거기로 보냈다. 나가라는 얘기였다. 사표제출을 거부하는 그에게 선우휘는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부의 언론사 외신부장들 현지시찰 주선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이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고 회사와 정부의 반공정책에도 어긋난다며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통고했다. 이후 거듭되는 언론사·교수직 해직의 시작이었다. 그 사건 뒤에는 특별대우를 약속하며 리영희에게 베트남행을 요구한 중앙정보부가 있었다.

그 4년 전인 1964년엔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회의(비동맹그룹)가 남북한을 동시 초청해 유엔 동시가입 가능성을 토의할 것이라는 특종을 썼다가 ‘국가기밀을 누설한 이적행위’(반공법 위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1961년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첫 미국방문 수행기자로 갔다가 도중에 본국으로 조기소환당했다. 역시 특종보도 때문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박정희-케네디 회담에서 미국이 군사원조도 하고 경제원조도 하고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승인도 해주기로 했다는 ‘박정희 외교의 대성과’를 선전했을 때, 리영희는 케네디 쪽이 조속한 민정이양과 군의 원대복귀, 조속한 한-일 국교정상화, 베트남사태 협력 등을 촉구했다는 ‘놀라운’ 내용을 타전했다. ‘특종 기자’, ‘진짜 기자’ 리영희의 특종 행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오랫동안 미신처럼 남한사회에서 믿어오던 ‘허위’와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정치적·사상적 우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라고 했고, ‘리영희 저작집’ 마지막 제12권 <21세기 아침의 사색>(2006년), 50여년에 걸친 자신의 연구와 집필생활의 마지막 마무리이기도 했던 그 책에서도 말했다. “난 휴머니스트입니다. 인도주의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이고, 덧붙인다면 우상파괴자!” 그렇다. 타협을 몰랐던 선비 리영희, 그는 한국 현대사 최강의 우상 파괴자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이었다. 그를 가둔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그 자신을 일평생 고통 속에 몰아넣은 괴물은 ‘진실’이었다. 그 빛에 비춰 보면, 그의 생애를 관통했던 고난이 곧 그의 영광이었다.

리영희는 1929년 금광으로 유명했던 평안북도 운산군의 북진면이란 외진 곳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로 자란 곳은 5살 때 영림서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옮겨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이다. 김소월이 “물로 사흘 배 사흘 … 산너머 먼 육천리”(<삭주구성>)라고 노래했던 대관은 말년의 그가 “오늘까지도 해가 갈수록 더 그리워지는 추억”(<역정> 1988년)이 서린 고향이었다. 거기에 남은 형과 작은 누이를 그는 끝내 이승에선 다시 만나지 못했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초등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공립학교 전기과에 들어갔다. 동창도 친구도 없이 살아야 했던 가난하고 외로운 그 시절, 오직 스스로를 단련하고 키워야 했던 고달픈 서울 유학생활이 연줄을 거부하고 타협을 물리쳤던 나중의 ‘외로운 호랑이’ 리영희의 탄생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1946년 그가 국립해양대학 항해과(2기)를 택한 것도 그런 간난과 무관하지 않다.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가 부담한다는 모집공고를 보고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재학시절 ‘여순반란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고 백범 김구에 경도됐던 리영희는 졸업 뒤 친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경북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가 됐으며, 전쟁이 터진 뒤 영어교사를 우대한다는 미군 상대의 연락(통역)장교 모집에 응했다. 이후 7년 백발백중의 권총 명사수였던 그는 군의 부패와 폭력, 병무행정의 난맥상, 미국의 이면을 무참하게 경험하면서 “국가관과 전쟁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 앞으로의 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에, 말하자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리영희가 언론사 기자가 된 것은 말년 통역장교 시절 부산 양정동의 8평짜리 셋집 변소에서 우연히 찾아낸 신문 밑바닥 기자모집 광고였다. 1957년 리영희는 남다른 영어실력을 밑천 삼아 당시 한국 최대 통신사였던 <합동통신>에 입사했고, 통신사 일을 하면서 1959~61년까지 <워싱턴 포스트>의 통신원(4·19혁명 전까지는 익명)으로 활약했다. 지금도 <워싱턴 포스트>를 뒤지면 나오는 그의 기사들은 미국사회에 당시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이승만 독재정권 치하의 한국 실정 제대로 알리기를 한 셈이 됐고 그것은 이승만 하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활약 덕에 1959년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귀로에 들른 일본 도쿄 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들 중의 하나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장지락)의 생애를 담은 그 책은 리영희가 본격적인 중국연구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야만의 시대’에 맞선 ‘전사’, ‘의식화의 교사’가 됐지만 리영희는 ’타고난 투사’ 또는 ‘의식화의 원흉’은 결코 아니었다. “소음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지적(정신적) 수준과 반비례한다”는 영국 속담까지 인용할 정도로 시끄러운 것을 못견뎌 하고 행동의 절제를 미덕으로 안 그는 자신이 소심한 사람이라며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문익환 목사처럼 낭만주의자가 못 되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다만 냉철한 현실감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니까.”(<대화>) 그는 결코 대세나 주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주류가 아무런 근본적 인식 없이 그냥 거죽만 보고 한 방향으로 쏠릴 때 나는 항상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인터뷰 때 리영희는 “미국이 장차 동북아에서 강대해지는 중국과, 과거 소련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전쟁을 하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으로선 그 때문에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필요하고 남한은 거기에 ‘0.5 군사국가’로 덧붙이려 한다. 특히 강대국으로 행세했던 일본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지극히 강하다. 지금의 이런 동북아 상황은 1930년대 초와 아주 흡사하다”는 준렬한 정세인식과 함께 그들에게 동조하는 국내 기득권세력의 지배욕을 비판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정신은 쉬지 않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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