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이유 철거 근거없다
서울시가 2009년 새 청사 건축 계획을 발표하면서 명확한 근거 없이 문화재인 현재 시청 건물의 핵심 부분을 헐겠다고 발표했다는 논란에 싸였다.
서울시는 지난달 29일 2009년 새 청사를 지은 뒤 2010년께 문화재청과 협의해 지금의 시청 건물 가운데 뒤쪽에 있는 ‘태평홀’ 부분을 헐겠다고 밝혔다. 태평홀 철거의 근거로 1926년 지어진 지금의 시청 건물이 일본의 ‘本’자를 본뜬 것으로 일제 잔재라고 서울시는 지적했다. 이것은 북악의 ‘大’자 모양과 헐린 조선총독부 건물의 ‘日’자 모양과 함께 ‘大日本’이라는 단어를 구성한다고 알려져 왔다. 서울시는 또 새 청사를 현재 설계대로 지을 경우, 시청사 마당 한가운데 태평홀이 위치해 효율적 공간 이용에 방해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문화재 전문가들은 서울시의 이런 주장이 근거없으며, 근대 문화재를 멋대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문화재연구가 이순우(44)씨는 “시청 건물이 일본의 ‘本’자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속설일 뿐”이라며 경성부청(지금의 서울시청) 건물 설계에 참여했던 총독부 건축과 기수 사사 게이이치가 1926년 <조선과 건축>에 쓴 글을 소개했다.
이 글을 보면 “평면도는 부지의 경계에 붙여서 궁형(弓形)으로 하고 (…) 의장(지금의 태평홀)은 중앙 뒤쪽에 따로 설치하였다”고 돼 있다. 설계자는 건물 모양을 ‘本’이 아닌 ‘弓’으로 인식한 것이다. 또 사사는, 소공동, 남대문로 등으로 터 위치가 바뀔 때마다 배치도를 고쳐 그렸다고도 밝혔다. 이는 처음부터 건물 모양에 어떤 글자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님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씨는 “북악산·조선총독부·서울시청 건물이 이어져 한자로 ‘大日本’을 이룬다는 말은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대단한 ‘오버’”라고 꼬집었다.
문화재위원인 김정동 목원대 교수(한국건축사)도 “서울시 주장은 어떤 문헌의 근거도 없는 낭설”이라며 “당시의 대지 형태에 따라 건물을 짓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10여년 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철거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일축했다.
최준영 문화연대 정책실장도 “서울시가 현 시청사가 문화재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새 청사를 설계하다 생긴 일”이라며 “새 건물을 지으려 문화재 일부를 철거하겠다는 서울시 발상이 황당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박철규 서울시 신청사증축 추진반장은 “시청 건물이 ‘本’자 모양으로 지어졌다는 문헌 증거는 알지 못한다”며 서울시의 지난달 태평홀 철거계획 발표 당시와는 엇갈리는 답변을 내놨다. 그러나 철거계획 변경 여부에 대해서는 “새 청사 설계안의 문화재청 심의 뒤 더 고려해보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청 건물은 2003년 서울시의 신청에 따라 등록문화재(52호)가 됐으며, 커다란 돔 형태로 생긴 태평홀은 1926년 경성부청 건물이 완공된 뒤 경성부회(지금의 서울시의회)의 회의장으로, 광복 뒤 대회의실과 접견실 등으로 쓰였다. 현재는 간부 회의나 시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