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성희롱) 채팅방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도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서울북부지방법원 형사1단독 조미옥 판사 심리로 진행된 모욕 사건 증인으로 나온 변아무개(25)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여성 80여명이 성희롱당하고 있는 대화방을 적발하고 사과를 요구한 뒤, 변씨는 1년 넘게 가해자 쪽의 협박과 고소 등 2차 가해를 겪고 있다고 했다. 이날 법정엔 변씨를 응원하는 방청객 32명이 자리를 메웠다.
변씨가 본인을 상습적으로 성희롱하는 단체 대화방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3월이다. 6개월 동안 만난 전 연인 ㄱ씨의 휴대전화에서 그를 포함한 6명이 모여 주변 여성 80여명을 상대로 끔찍한 성희롱을 일삼는 대화방을 발견했다. 변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분 단위로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변씨는 ㄱ씨에게 “(다른 피해 여성에게도) 모든 걸 밝히고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ㄱ씨가 돌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변씨는 “미우면서도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두려움 탓에 외려 변씨가 가해자를 돌보는 황당한 상황이 이어졌다. 새벽에 걸려온 “죽겠다”는 전화에 온갖 하소연을 들어줬다. 엉망이 된 ㄱ씨 방을 치워주기도 했다. 지난해 7월 ㄱ씨는 결국 목숨을 끊었다.
다른 가해자들도 변씨를 윽박질렀다. 성희롱 대화방에 있던 ㄴ씨는 ‘(ㄱ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참으로 좋은 결과겠다’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 비꼬았다. ㄱ씨가 목숨을 끊은 뒤엔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느냐’고 했다. 변씨는 “공포스러웠다. 문자를 받을 때마다 공황 증세가 왔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라서 늘 약을 먹었다”고 했다. 변씨는 지난해 9월 단체 대화방 참여자 중 3명을 경찰에 고소했다. ㄱ씨가 목숨을 끊은 데 대해 유가족도 변씨를 고소했다. 변씨가 본인의 에스엔에스(SNS) 일부 공개 계정으로 단체대화방의 내용을 올리는 등 ㄱ씨에게 압박을 줬다는 것이다. 고소 내용을 보면, 음란한 내용을 주고받는 행위는 ‘장난식’이라고 표현됐고, ‘공론화하지 않을테니 사과문을 작성하라’는 변씨 요구는 ‘강요’, ‘협박’으로 적혔다. 인천 부평경찰서는 변씨를 지난 2월 검찰에 송치했다.
변씨는 가해자 쪽의 협박과 고소에 꿋꿋하게 버텼지만, 정작 대화방 가해자에 대한 수사기관의 처분 결과를 받고 허망해졌다고 했다. 변씨가 고소한 단체 대화방 3명 중 1명은 갑자기 해외로 나가는 바람에 기소중지됐다. 다른 1명은 상대적으로 사안이 경미할 때 내려지는 구약식 처분을 받았다. 같은 처분을 받은 나머지 1명, ㄷ씨는 변호사 3명을 선임해 무죄를 주장하는 취지의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지난달 29일 변씨가 서울북부지법 법정에 증인으로 선 이유다. 검찰은 이날 ㄷ씨에게 벌금 30만원을 구형했다. 숨 막히게 고요했던 법정에 일순간 방청객의 한숨과 탄식이 흘렀다. 변씨는 한겨레에 “명확한 성희롱 발언이 있었고 성적 모욕감을 느꼈는데도 성범죄가 아닌 모욕죄로 분류돼 형량이 낮아졌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고통에도 변씨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다른 이들의 응원과 지지 덕분이었다고 한다. 재판이 끝난 뒤 방청객들은 변씨에게 “힘내라”, “함께 싸우자”는 말을 건넸다. 대학생 김지민(24)씨는 “주변 지인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로 재판을 받았는데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함께 돕고 싶은 마음으로 방청하러 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딥페이크(불법합성물) 사태의 전신이라고 말합니다. 성폭력은 비뚤어진 여성관을 갖고 여성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놀이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씨는 마지막으로 재판부에 힘주어 말했다. 선고는 오는 26일 이뤄진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조승우 교육연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