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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술집에서 폭탄주를 만들어 건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서울의 한 술집에서 폭탄주를 만들어 건배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고인이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며 제출한 문진표를 보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표기되어 있고, 1년에 3번 마신다고 표기되어 있을 정도로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중략) 이같이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고인이 만취할 정도의 동동주를 마셨다는 것은 평소 함정근무의 조직문화에 더해 어쩔 수 없이 사실상 강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대리인의 항소 준비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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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순경으로 임용돼 2021년 7월부터 해경에서 함정(항해) 근무를 하던 28살 ㄱ씨. 사고가 난 날인 2021년 8월17일엔 원래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ㄱ씨는 그날 직속상관과 함정 안에서 단둘이 술을 마셔야 했다. 약속한 시간이 됐지만 다른 팀원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사는 이미 오전부터 “비가 오고 하니 파전에 막걸리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에 ㄱ씨가 이 자리에 빠지기는 쉽지 않았다. 근무 특성상 단체생활이 중요한 만큼 ㄱ씨는 함정 근처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날 ㄱ씨는 과음했다. 마지막을 목격했던 동료들은 만취 수준의 동동주를 마신 ㄱ씨가 도크장(배의 건조나 수리, 짐의 하역을 위한 장소)에서 안전난간 바깥쪽 바닥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며 15m 아래로 추락했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시간 30분 뒤에 숨을 거뒀다. 혈중알코올농도는 0.217%였다.

유족인 아버지는 ㄱ씨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라며 인사혁신처에 순직유족급여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ㄱ씨가 사망 당일 술을 마신 행위가 공식적인 회식 계획 등 문서로 존재하지 않으며 △음주 뒤 도크장 쪽으로 걸어간 이동 경로가 통상적인 퇴근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며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ㄱ씨 아버지는 법원에 인사혁신처 처분에 대한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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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쟁점은 ㄱ씨가 업무를 끝내고 참석한 술자리가 공식적인 행사에 해당하느냐에 맞춰졌다. 1심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고인이 술을 마신 술자리가 소속기관의 지배·관리하에 진행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공무 수행과 관련된 술자리라고 하더라도, 이 사고가 회식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따르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다거나 출퇴근 경로에서 수반되는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행위 때문에 일어났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단체생활인 해경 함정 근무의 특성상 ㄱ씨가 자발적으로 술자리에 참석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서울고법 행정4-3부(재판장 정선재)는 지난 21일 “폐쇄적인 단체생활 속에서 직속상관이 주도하는 저녁 식사에 참석을 거부하기는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또 ㄱ씨가 통상적이지 않은 경로로 퇴근했다는 점을 지적한 원심 판단에 대해서는 “이동 경로가 이례적인 것은 사실이나, 과음으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에 장애가 있는 상태인 것이 주된 원인이 되었기에 이것이 공무상 재해 판단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ㄱ씨의 대리를 맡은 서수완 변호사(법무법인 감천)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함정 근무의 특수성, 위계질서, 회식에 이른 배경, 고인의 평소 음주량을 넘는 비자발적 과음이 원인이 된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영내에서 이뤄진 회식 이후 발생한 사고도 공무상 재해가 될 수 있다는 흔치 않은 판결”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