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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모습. 피해자 황정복씨 역시 형제복지원 건물을 짓는 노역을 강요받고 각종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피해자 황정복씨 제공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모습. 피해자 황정복씨 역시 형제복지원 건물을 짓는 노역을 강요받고 각종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피해자 황정복씨 제공

국민학생이던 9살 때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가 12년간 강제 노역과 학대를 당한 황정복(58)씨는 40여년 흐른 2022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로 인정됐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보건복지부에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는데 복지부는 지금까지 아무런 계획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2월 진실화해위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돼 평생 고문 후유증과 ‘간첩’ 낙인에 시달리다 숨진 한삼택씨에 대해서도 진실규명을 결정하며 정부에 ‘재심 등’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법무부는 유족이 제기한 재심에서 한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되레 ‘항소’로 응답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 결정 이후 해당 정부 부처에 과거사 피해 회복을 위한 권고 결정을 내리고 있지만, 6일 한겨레 취재 결과 일부 부처들은 이를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조차 제대로 제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제출된 이행계획 역시 부실투성이거나 권고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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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권고 미이행은 1기 진실화해위 때에도 논란이 됐다. 2010년 활동을 마무리한 1기 진실화해위는 정부 부처에 1271건의 권고를 내렸지만, 12년 뒤인 2022년까지도 258건(20%)의 권고가 이행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2월 국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9월22일부터 시행된 개정안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이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2차례 발간되는 ‘진실화해위 조사결과 보고서’에 담긴 권고의 이행을 관리하도록 책임이 부여됐다. 또 권고를 받은 각 정부 부처는 진실화해위가 조사보고서를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점에서 3개월 안에 이행계획을 행안부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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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서산개척단의 강제 노역 자료사진. 보건복지부는 서산개척단 사건과 관련한 국가 사과, 피해 회복 조치에 대한 이행계획을 제출하지 않았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서산개척단의 강제 노역 자료사진. 보건복지부는 서산개척단 사건과 관련한 국가 사과, 피해 회복 조치에 대한 이행계획을 제출하지 않았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102개 사건에 대해 503건의 세부 권고를 내렸다. 이에 행안부는 지난해 9월22일 각 정부 부처에 503건에 대한 이행계획을 같은 해 12월21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행안부에서 제출받은 ‘진실화해위원회 권고사항 이행계획’ 자료를 보면, 24건(국방부 15건, 보건복지부 9건)의 이행계획이 아직도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국방부는 지난해 12월21일까지 총 83건의 이행계획을 제출해야 했지만 이 가운데 15건(18%)을 제출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역시 진실화해위가 권고한 12건의 이행계획 중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등 9건(75%)을 미제출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우리 부처 소관이 아니어서 해당 사건의 이행계획을 제출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에 소관 부처 조율을 요청한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복지부 관계자 역시 “형제복지원 사건 등은 행정안전부에서 이행하는 게 맞다”며 “진실화해위에 여러 차례 담당 부처를 바꿔달라고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에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조율 계획을 잡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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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된 479건의 이행계획도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일부엔 진실화해위 권고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마저 포함됐다.

총련 관련 간첩 조작 사건으로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고 한삼택씨에 대한 법무부의 권고 이행계획이 대표적이다. 진실화해위는 법무부에 한씨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 등 조치’를 권고했는데 법무부는 “이미 2021년에 유족이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1월 무죄가 났으며 검찰 항소 여부 검토 중”이라는 이행계획을 냈다. 이행계획을 실제로 수행하는 이행률 역시 높지 않다.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전체 이행계획의 이행률은 19%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과거사 사건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는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되고 있다. 고령에 갖은 고초를 겪어 건강마저 좋지 않은 과거사 피해자들은 배상도, 사과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있다. 4·3항쟁이나 5·18 민주화운동처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특별법을 통한 보상 등 대안을 마련한다면 피해자들의 개별 소송은 확연히 줄 수 있다.

최근엔 정부 부처뿐 아니라 진실화해위 자체도 논란이 되고 있다. 뉴라이트 출신의 김광동 위원장이 취임한 뒤 진실화해위가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건영 의원은 한겨레에 “국가폭력으로 인한 희생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진실화해위의 출범 취지가 무너진 것 같다”며 “진실규명이라는 대원칙에 걸맞은 위원회 운영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