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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성착취물 2천개나 받았는데…법원은 너의 죄를 감하노라?

등록 :2022-05-24 04:59수정 :2022-05-24 16:31

[n번방 일반 가담자 1심 판결문 전수 분석]
판결문 양형이유 보니
가해자 중심 감경사유 곳곳에
“사법부 시각 질적 도약 필요”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0년 3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활동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0년 3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활동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텔레그램 성착취는 조주빈과 몇몇 주범들만의 범행이 아니다. 2020년 3월 조주빈이 검거될 당시, 엔(n)번방과 박사방을 비롯한 130개의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에 26만명(추산)에 이르는 ‘얼굴 없는 가담자’들이 있었다. 성착취물을 소지·판매·재유포한 이들은, 조주빈 일당이 성착취 범행을 이어가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지난해 말 조주빈 일당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마무리됐지만, 여전히 법정에서는 얼굴 없는 가담자들의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는 조주빈 뒤에 숨은 엔번방 일반 가담자 378명의 1심 판결문 366건을 전수 분석했다.

엔번방 일반 가담자 판결문의 양형이유를 보면 사법부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인식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의 1심 법원들은 디지털 성폭력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요구하는 양형이유를 들어 일반 가담자 처벌 수위를 높였다. “아동 성착취 영상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이 있는 것이라 결국 피고인 같은 수요자들의 행위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의 동기를 제공한다” “피고인 같은 다수의 방조자들 때문에 주범의 배포 행위가 궁극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착취물은 한 번 제작되면 끊임없이 복제·유포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반복적으로 고통을 준다”는 가중처벌 사유가 대표적이다.

중학교 3학년생 4명이 공동 피고인이었던 사건에서는 “범행 방법을 알게 된 경위를 보면 다수의 어른들이 만들어놓고 퍼뜨려놓은 그릇된 성인식이 아직 중학생으로서 사리분별력이 부족한 피고인들의 행동에 큰 해악을 미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성착취물이 제작·유통되는 구조적 문제를 짚은 양형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미온적 인식은 여전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판결문을 검토한 전문가들은 “엔번방 사건이 보도돼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에 벌어진 범죄라, 범행 당시에는 불법성 인식이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양형 이유를 대표적인 ‘문제적 감형 사유’로 꼽았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성착취물의 소지, 유포 등은 엔번방 사건 이전에도 이미 불법이었다. 엔번방 사건으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것과 별개로, 이런 양형 이유가 법원이 쓰는 판결문에 들어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피고인들이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며 성폭력상담소에 후원금을 보낸 내역이나 봉사활동, 재범 예방 교육을 받았다는 증명서를 재판부가 감형사유로 받아주는 것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피고인들이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한 경우, 반성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후원금 내역을 제출한다는 것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후원과 봉사 내역 등을 제출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들의 정보교환 카페에서 이미 ‘감형 패키지’로 알려져 있다. 일부 피고인들은 선고 전 감형을 위해 성폭력상담소에 후원금을 보낸 뒤 선고가 끝나면 후원금을 되돌려달라고 하는 경우마저 있다”고 전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소지나 방조했을 뿐 유포하지는 않았다”는 감형 사유도 문제로 지적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소지 △배포·제공 △판매를 모두 별도 범죄로 정하고 있다. 별개 범죄인데도 유독 아동 성착취물 소지·방조 사건에서는 판매 등 다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감형 사유로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 성착취대응팀의 조은호 변호사는 “별도 범죄를 안 저질렀다는 이유를 소지 범죄의 감형사유로 삼는 것은 마치 절도범이 조용히 물건만 훔쳐갔다고 형을 감경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부재도 주요하게 지적된다. “돈을 내고 다운받은 것은 아니”라는 감형 사유가 대표적이다. 피해자에겐 피고인들이 돈을 내고 구입하건 공짜로 다운로드를 받건 똑같은 성착취물 유포 피해를 입은 것이지만, 일부 재판부는 무료로 다운받은 피고인들에게는 범행 의도가 가볍다고 보고 감경 사유로 삼는 사례가 있었다. 서 변호사는 “법원이 여전히 가해자 중심적 사고를 하며 부적절한 감형 사유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의 범행에 불과하다” “소지한 기간이 짧다”는 양형이유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각각 385개, 1775개의 성착취물이 압축저장된 파일을 다운로드한 피고인에게 ‘범행이 반복적이지 않았다’는 감경 사유를 적용했다. 김혜정 소장은 “영상 하나하나에 피해자의 인생이 걸려있다. 피해자들은 영상이 유포되었는지 확인하고, 삭제하고,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 한번의 범행이라서, 소지한 기간이 짧아서 감형을 해주는 것은 가해자 위주의 사고”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를 넘어 양형 이유에서도 ‘질적 도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범죄 사실 인정과 법 적용은 법 기술의 영역이지만, 양형 이유는 가치관의 영역이다. 양형 이유에 나타난 사법부 시각은,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이 디지털 성범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늠자 구실을 하게 된다. 서 변호사는 “판결문 양형 이유는 앞으로 일어날 범죄에 사법부가 어떻게 판단할지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선례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관행적 양형 이유는) 성폭력 가해자들이 감형 사유 충족을 위해 반성 없는 반성을 하는 문화로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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