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송유관공사 저유소에 큰불이 발생해 소방대원 등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고양/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18년 10월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송유관공사 저유소에 큰불이 발생해 소방대원 등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고양/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경찰의 외국인 수사 과정에 참여한 통역인의 중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외국인을 당사자로 하는 사건이 늘며 통역인의 참여도 늘고 있으나, 통역인에게 피의자의 진술에 대한 의견을 묻는 등 공정한 통역을 방해하는 경찰 수사 관행을 바꾸라는 취지다.

3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인권위는 지난달 24일 “통역의 정확성과 공정성, 중립성을 위해서는 사법통역인에게 사건이나 피의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요구하거나 사건 규명에 대한 조언이나 제안을 부가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며 경찰청장에게 “피의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이나 선입견을 가진 통역인이 통역에서 배제될 수 있도록 수사통역의 제척에 관해 내부 규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는 스리랑카 국적의 디무두 누완(31)이 경기 고양경찰서 수사관들로부터 독립적이고 공정한 통역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다며 진정을 제기해 나온 판단이다. 디무두는 2018년 10월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으로 실화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해 6월 항소심에서 벌금형을 받은 뒤 상고를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상태다. 2018년 10월7일 디무두는 풍등을 호기심에 날렸고 풍등 불씨는 저유소 인근 건초에 붙은 뒤 탱크에서 흘러나온 유증기를 통해 탱크 내부로 옮겨붙어 불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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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디무두가 10월8일 긴급체포된 뒤 진행된 경찰 조사과정에서 불거졌다. 1시간48분 동안 통역인 ㄱ씨를 통해 디무두를 조사한 뒤 경찰은 ㄱ씨만 따로 참고인으로 조사하며 “통역을 할 때 디무두의 태도는 어땠나”, “거짓말을 하는 부분이 있던가”, “정말 그 뜻을 몰랐다고 생각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해당 통역인은 네번째 피의자 신문에서 다시 통역인으로 참여했다.

인권위는 디무두의 진정에 대해 적법절차에 반하지 않았다며 기각결정을 내렸으나 사법통역인의 중립성을 강조했다. 또 경찰청장에게 “사건의 통역인에 대한 참고인 조사는 가급적 지양하고, 참고인으로 조사한 통역인을 피의자 신문에 통역인으로 참여시키지 말라”는 의견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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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형사소송법이나 ‘인권보호수사규칙’(법무부령), ‘범죄수사규칙’(경찰청 훈령)에 외국인의 진술은 통역인이 통역해야 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중립성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인권위가 진정을 기각하면서도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사법통역인협회는 윤리규정에 통역인이 통역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코멘트해선 안 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등 외국에선 사법통역인의 ‘중립성’을 필수적인 직업윤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국내 경찰관들은 사법통역인이 지켜야 할 중립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지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가 2015년 발표한 논문 ‘경찰통역 실태와 경찰관의 인식조사 사례 연구’를 보면, 설문 대상자(26명)인 경찰관 중 57.7%가 ‘통역인은 경찰관의 요청이 있을 때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고 답했고, 26.9%는 ‘통역인은 자유롭게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 교수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근 경찰관을 대상으로 통역과 관련한 교육 등이 이뤄지는 등 인식 개선이 점차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외사과를 제외한 일선 경찰들 사이에서는 통역인의 중립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사법통역인들 역시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짜 같냐’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어 고충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는다”고 했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