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누구와 싸우는가, 타인인가 혹은 자신인가, 아들은 떠날 채비를 해, 뜻을 이뤄달란 말을 남긴 채 (…) 그녀 혼자 짊어지기 무거운 것들. 데모의 대모, 떠받들어 노동자들의 대모.”(래퍼 지화의 ‘데모 대모’ 중)
지난 7일과 8일 열린 제2회 전태일힙합음악제엔 본선을 거친 열두 팀의 무대가 펼쳐졌다. 2019년에 이어 두번째 열린 이 음악제는 특히 올해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10주기를 맞은 해라 더욱 뜻깊었다. 이 여사의 생전 메시지인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라, 하나가 되어라”를 대표 문구로 내걸었다. 열사의 분신 이후 남은 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 싸운 이 여사는 아들을 잃은 뒤 ‘노동자가 하나 되지 않으면 천년, 만년 싸워도 소용이 없다’며 투쟁과 연대의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다. 이 여사의 기운이 전해졌을까? 올해 음악제에선 특히 여성 래퍼 참가자들의 활약이 눈길을 끌었다.
“최근 겪은 일 중에 부당하다고 느낀 때가 있었나요?”(사회자)
“‘(옷을) 좀 까고 그러면 여자들은 쉽게 뜨는 거 아니야?’ 이런 말을 들어가지고요. 제가 이런 옷과 머리 스타일(지화는 이날 정장 스타일의 검은 옷과 레게머리를 했다)로 랩을 해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래퍼 지화)
무대에 오른 래퍼 대부분이 코로나19 이후 실력을 마음껏 뽐낼 무대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전태일힙합음악제는 이들이 오랜만에 끼를 발산할 기회를 제공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서울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51년의 세월이 흐른 2021년. 분신과 시위가 아닌 춤과 노래로 저항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청년들이 온몸을 던져 외치는 목소리의 절박함은 비슷했다. 무대는 지금의 시대정신을 랩이라는 형식으로 발산하는 젊은이들로 뜨겁게 달궈졌다.
이번 무대에서는 유독 사회적 약자들의 상황을 노래한 절절한 가사들이 많았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사회문제를 무대 위에서 표출하며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래퍼들이 많았다.
“배고프지 그래 다 가득하게 굶주린 배를 채워가, 내가 여기 원한 것은 생존, 걔네들이 먹다 버린 걸로 배를 때우고 나서 살아남아 싸워가지.”
래퍼 차류한은 풍요롭게만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 여전히 배곯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과 이들의 생존을 걱정하며 노래했다. 차류한은 공연 뒤 사회자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초생활수급자거든요. 그런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결국엔 저도 약자의 입장에서 제 이야기를 써낸 것이죠.”
최종 3인의 우승자 가운데 한명인 래퍼 코코펠리는 ‘케이-어스’(K-us)란 곡을 통해 코로나19의 혼돈 속에서 성공적인 방역 대처라고 자화자찬하는 정부 태도의 그늘진 이면을 노래했다. “누군 마스크 살 돈이 없어 사지도 못하고, 누군 장사가 안돼서 목이 미칠 듯이 말라… 앞에 붙인 케이(K)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결정하는 건 결국엔 우리들의 몫.”
[%%IMAGE2%%]그렇다면 왜 전태일과 힙합 음악의 만남일까. 전태일기념관 쪽은 2019년 1회 음악제를 개최하기 전 힙합 뮤지션들에게 자문했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힙한 뮤지션들은 스물세살의 나이에 인권과 노동권 문제에 헌신한 전태일의 정신과 뉴욕 빈민가의 흑인 인권운동을 시작으로 꽃피운 힙합이 만난다면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일 것이라며 반겼다고 한다. 한편으로 힙합계에선 힙합 특유의 저항정신이 최근 일부 래퍼들의 무대 위 욕설이나 단순한 쾌락 추구 등 일탈로 변질되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기에 전태일 정신을 내거는 힙합음악제가 탄생하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란 반응이 나왔다. 오동진 전태일기념관 관장은 “요즘 젊은이들이 저항과 비판 정신을 힙합이란 음악 장르를 통해 분출하는 것을 포착했다”며 “지금 세대들에게 어쩌면 몸을 불사른 ‘분신’으로만 기억되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현재 시대 상황 속에서 이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태일기념관 쪽에선 애초 ‘전태일과 힙합’을 연결짓는 파격적인 시도가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우려는 두차례 음악제 개최를 통해 말끔히 사라졌다. 참가자 수만 첫번째, 두번째 음악제에 각각 400명, 200명에 이르렀다. 참가자들의 무대 위 몸짓과 노랫말 등이 전태일 정신을 비롯해 애초 계획했던 콘셉트와도 잘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전태일기념관은 유튜브 채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에 ‘태일의 음악다방’ 코너를 운영하며 젊은 세대들과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IMAGE3%%]지금 세대들에겐 이름마저 낯설 수 있는 전태일 열사는 어린 시절부터 신문팔이, 빈병줍기, 성냥팔이 생활을 하며 힘겹게 성장했다. 열일곱살 때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삼일사에 시다(견습공)로 취직했다. 재단보조를 거쳐 재단사로 승진했지만, 업주들의 횡포와 착취구조를 깨닫고 저항에 나섰다. 실제 피복공장 상황은 참담했다. 당시 평화시장에선 천장 높이가 1.6미터밖에 되지 않는 2평 정도 작업장에 많게는 일꾼 15명씩 몰아넣고, 하루 최대 16시간씩 고된 일을 시켰다. 조수 일을 하는 이들은 주로 나이가 고작 열세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 여자아이들이었다. 이들은 먼지 가득한 좁은 피복 작업장에서 폐결핵과 신경성 위장병을 안고 생활했다. 전태일은 재단사들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다가, 공장에서 해고됐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노동을 하며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나섰다.
1970년 11월13일, 그는 노동자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그는 “엄마, 내가 못다 이룬 소원들을 엄마가 제 대신 이루어주세요” “친구들아, 절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줘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요즘 세대들과 전태일 사이에 얼핏 시대적 접점이 없는 듯 보인다. 엄혹한 독재정권과 정부 주도의 개발독재 시대는 막을 내린 지 오래이고, 봉제공장에서 14시간 미싱을 돌리던 10대 여공들도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역사 속 한 장면이 됐다. 1980년 이후 태어난 엠제트(MZ)세대에게도 전태일 열사가 현재적 의미를 지닐까? 청년단체 ‘청년전태일’ 이소영 대표는 자신의 일자리를 갖고 난 뒤에야, 그저 현대사 책에 등장하는 인물 정도로 여겼던 전태일 열사를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인물로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저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전태일 열사는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처음엔 초등학교 필독도서에서 만나는 인물로만 생각해왔다”며 “그러다 직접 사회생활을 하며 일을 해보니 전태일 열사가 목소리를 높인 노동인권의 문제에 공감하게 되더라”고 전했다.
주 52시간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들이 점점 더 생기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 관련 법 테두리 밖의 노동자들이 많다. 정보기술(IT)의 발달 등으로 노동 방식이 크게 변화한 상황에서 근로기준법도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종민 민주노총 서비스일반노조 쿠팡이츠지회 준비위원장은 “1970년대와 지금은 노동환경이나 현실이 크게 달라졌지만, 열악한 현실을 노동자 손으로 바꿔야 한다는 전태일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외침을 이제는 ‘근로기준법을 확장하라’로 바꾸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근 전남 여수의 한 요트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교생 홍정운(18)군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약자인 10대 노동자가 희생되는 현실은 1970년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소영 대표는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만났던 여공들의 공장 현실과 지금의 청년 노동자들의 현실이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환경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개별 노동자가 느끼는 삶의 고통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여전히 전태일 정신을 돌아보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