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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가 움직이며 소재를 가공하는 머시닝센터.
공구가 움직이며 소재를 가공하는 머시닝센터.

‘지이잉~’ 쇠 깎는 소리와 함께 검은 쇳가루가 작은 철공소에 날리기 시작한다. 쇳덩어리를 문 기계들은 바삐 움직이며 금속을 깎고, 뚫고, 다듬어 부품을 만들어 낸다.

자동차·반도체의 시작은 작은 부품들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만난 정동호씨는 철공소 ‘동호기계’를 운영하는 13년차 사장님이다. 올해 마흔인 그는 문래동 철공소 골목의 중견 소공인(작은 규모로 제조업을 하는 개인·기업)이기도 하다. 철공소 골목에선 다수의 30~40년차 숙련 기술차들과 소수의 10년차 미만 새내기 기술자들이 함께 일한다.

동호기계는 13명의 직원도 함께 일궈왔다. 1인 철공소가 많은 문래동에선 규모가 꽤 큰 편에 속한다. 다양한 산업에 활용되는 대형 기계의 ‘작은 부품’을 만든다. 자동차용·건설용 볼트를 찍어내는 볼트 포머(Bolt Former) 기계의 부품, 반도체 생산 장비에 사용되는 부품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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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는 소공인 정동호씨가 머시닝센터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는 소공인 정동호씨가 머시닝센터를 설명하고 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하루

그중에서도 동호기계의 주전공은 ‘머시닝센터(Machining Center)’다. 머시닝센터는 설계도면을 입력하면 그대로 소재를 가공하는 기계다. 0.001㎜까지 정밀한 가공이 가능하다. 도면만 있다면 어떤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작은 철공소에서 만들어지는 부품의 종류에는 한계가 없다.

철공소에서 정씨의 하루는 오전 7시부터 기계와 보조를 맞추며 시작된다. 보통 오후 6시에 퇴근하지만, 오후 10시까지 잔업을 하는 날도 잦다. 그는 기계가 돌아가는 중간중간 소재가 설계도에 맞게 제작되고 있는지, 소재와 공구가 혹시나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한다. 다음 제작에 들어갈 소재도 미리 정리해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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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한 물건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다. 정씨는 작은 공장 안에서만 하루에 1만~1만5천보를 걷는다. 자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 정씨의 하루도 기계처럼 쉴 틈 없이 돌아간다.

동호기계 직원이 머시닝센터 테이블에 가공 소재를 고정한 뒤 작업 준비를 하고 있다.
동호기계 직원이 머시닝센터 테이블에 가공 소재를 고정한 뒤 작업 준비를 하고 있다.

국자 대신 공구를 쥐다

원래는 요리사가 되려고 했었다. 정씨는 대학에서 호텔조리학과를 전공했고, 국외로 요리 유학도 다녀왔다. 칼과 국자 대신 공구를 쥐게 된 건 철공소를 운영했던 아버지의 제안 때문이다. 고민했지만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일하다 보니 가공도 요리처럼 손으로 하는 일이라 재미가 있었다. 그게 벌써 13년이 됐다. “손으로 하는 건 다 좋아해요. 거친 소재에서 곱고 반짝반짝하고 매끈한 물건이 나오면 기분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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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정씨도 기술을 힘들게 배웠다. 머시닝센터는 아버지도 모르는 기술이라 현장에서 부딪혀야 했다. 생계와 직결되는 기술을 쉽게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어깨너머로 본 기술을 시행착오 끝에 익혔다. 퇴근 뒤에는 한국폴리텍대학 컴퓨터응용기계과에서 공부했다. 13년차가 된 지금도 제작하려는 물품마다, 사용하는 기계마다 다른 소재 가공법을 공부한다. 머시닝센터에 수치를 하나라도 잘못 입력하면 애써 만든 기계가 조립되지 않아, 소재 주문부터 가공까지 모든 공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철공소에서는 작은 실수도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기계 밖으로 튕겨 나온 쇳덩이에 머리를 다친 사람도, 프레스기에 끼어 손가락이 잘린 사람도 있다. 다행히 정씨는 아직 크게 다친 적은 없다. “현장에서는 늘 긴장해요. 퇴근하면 안도감부터 들더라고요.”

철공소 직원이 수작업으로 소재를 가공하고 있다
철공소 직원이 수작업으로 소재를 가공하고 있다

기계를 만지는 일이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씨는 만족스럽다. 난도가 높은 물품 제작을 잘 해냈을 때, 빠듯한 일정에도 납품 기한을 맞췄을 때, 만든 부품이 잘 조립됐다는 후기를 들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 커피전문점을 창업한 친구를 위해 커피를 만들 때 사용하는 탬퍼(커피 가루를 누르는 기구)를 직접 제작해 선물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했지만, 지금은 사무직 직장인의 월급 정도를 벌기도 한다.

정씨의 고민은 따로 있다. 주물, 판금, 연마 등 다양한 분야 공장이 모여 있는 문래동 기계금속단지가 사라지진 않을까 걱정이 크다. 지난해 6월 영등포구청은 문래동에 남은 기계금속 업체 1279곳을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로 ‘통이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반평생을 문래동에서 일한 고령의 사장님에게도, 정씨 같은 젊은 사장님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해요. 마음 편하게 문래동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요.”

글·사진 조윤상 피디 jo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