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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7일 등매보건진료소로 순회 진료 나온 이익재 공중보건의(한의사)가 주민 전종만씨의 어깨에 침을 놓고 있다. 이문영 기자
7월17일 등매보건진료소로 순회 진료 나온 이익재 공중보건의(한의사)가 주민 전종만씨의 어깨에 침을 놓고 있다. 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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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현실을 비추지만 차별적으로 비춘다. 드라마가 비춘 어떤 현실이 ‘프라임 타임’을 차지하는 동안 드라마가 비추지 않는 어떤 현실은 편성표에서 사라진다. 집만 나서면 선택할 ‘의료’가 널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을 때 의료에 닿는 과정 자체가 ‘비상사태’인 사람들의 곤경과 막막함은 드라마 소재조차 되지 못한다. 의료뿐 아니라 ‘의료의 이미지’에서도 ‘대도시 밖’은 말간 공백이 된다. ‘의료 대란 시대’에 정부 정책 개편을 결정하는 기준은 시청률보다 생명이어야 한다. 한번도 방영된 적 없는 논픽션 드라마를 한겨레가 시작했다. 의료취약지역 공공병원 메디컬 드라마 ‘영월 나이트’. 10부작이다.

폭우로 물이 부풀어 오른 계곡과 계곡 사이에 ‘의료의 최전선’은 숨어 있었다.

“위로 올려보시겠어요?”

가정집 안방을 닮은 ‘건강증진실’에서 공중보건의가 말했다. 전종만(89) 할아버지가 오른쪽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이 귀에 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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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지 않게 버텨보세요.”

이익재 공보의가 손으로 팔을 누르자 할아버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젊어서 학교 운동장 확장 공사를 하다 어깨를 삐끗한” 그는 “40년 넘도록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했”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픈” 주민들이 한의사 공보의가 진료소에 오는 날을 기다려 침을 맞으러 왔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몸으로 삶을 일구느라 “허리, 어깨, 무릎과 손목을 다친 주민들”(이익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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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내가 이해 가도록 말해봐.”

64㎜의 비가 쏟아지던 날(7월17일) 남편이 치료를 받는 동안 등매보건진료소(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유포리) 대기실에선 아내 강영숙(87) 할머니가 목청을 키웠다. 대기실이라지만 진료소장이 생활하는 관사 거실을 겸했다. 김소현 소장(간호사)이 할머니 귀에 ‘손 확성기’를 대고 한 어절씩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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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집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실 때, 얼마나, 걸리냐고요?”

들리지 않는 귀로 멀고 흐린 소리를 겨우 붙들며 할머니가 말했다.

“몰라. 한참 걸려. 나 너무 힘들어.”

“길 뚫린 오지”

북쪽과 서쪽을 휘돌아온 두 갈래의 물이 만나 가둔 땅에 진료소는 있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좁은 2차선 도로 주변으로 산이 넘쳤고 주택은 드물었다. 면적 217.32㎢의 봉평면엔 5530명(9월 현재)의 사람이 살았다. 땅은 서울시 최소 자치구인 중구(9.97㎢)의 21.79배였으나 인구는 중구(11만8458명)의 21.42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 봉평에 민간병원은 외과 의원 1곳과 치과 2곳, 한의원 1곳뿐이었다. 모두 면사무소 소재지(창동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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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만·강영숙 부부는 등매진료소에서 2㎞ 떨어진 유포1리에 살았다. 창동리까진 13㎞였다. “길 뚫린 오지”(박건희 평창군보건의료원장)였다. 차가 없는 주민들에게 길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었”다. 대중교통으로 병원에 가려면 하루 두어차례 운행하는 버스를 탄 뒤 하루 몇 번 안 다니는 버스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운전해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노인회관이나 마을 입구에서 읍내 나가는 차량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나 너무 힘들어.”

혼잣말에 가까운 대화를 시작할 때마다 할머니는 그 말을 후렴구처럼 되풀이했다.

“내가 이장님 볼 때마다 그래. 이장님, 우리 이장님, 나 너무 힘들어요. 아파서 병원에 가려고 버스 기다리다 보면 너무 서럽고 막막해. 너무너무 힘들어.”

할머니의 하소연이 그대로 넘어오는 ‘옆방’에선 김준현 공보의가 72살 남성을 상담했다. 심방세동 약을 처방받기 위해 평창읍(30㎞)까지 나가야 하는 그가 어려움을 토로하며 진료소에서 약을 받을 방법을 문의했다. “보건지소나 진료소 단위에선 없는 약이어서” 김준현은 원하는 답을 주지 못했다.

7월17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등매보건진료소에서 순회 진료 나온 김준현 봉평보건지소장(공중보건의·왼쪽 둘째)이 환자를 상담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주민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문영 기자
7월17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등매보건진료소에서 순회 진료 나온 김준현 봉평보건지소장(공중보건의·왼쪽 둘째)이 환자를 상담하는 동안 대기실에서 주민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문영 기자

평창군엔 보건소 대신 보건의료원이 있었다. 병원이 부족한 시·군·구에 보건소와 병원 기능을 합쳐 설립한 공공의료기관이었다. 면 단위에 두는 보건지소는 평창에 6곳 있었다. 지소장은 공보의(충원율 급감으로 대부분 의료취약지에서 한명이 여러 지소를 커버하거나 진료 중단)가 맡았다. 김준현은 봉평보건지소장이었다. 관내 보건진료소(리 단위 기관으로 평창엔 15곳)인 등매진료소와 면온진료소로 번갈아 격주 순회 진료를 나왔다. 한의사 공보의 이익재가 동행했다. 지소장의 진료소 순회는 박건희 보건의료원장이 만든 시스템이었다.

“도시 지인들한테 이쪽 상황을 말하면 다들 믿질 못해요.”

김소현이 진료소를 찾은 박건희에게 전했다.

‘의료사막’의 보건진료소(소장은 약 처방이 가능한 간호사)는 병원까지 갈 방법이 없는 고령의 주민들에게 마지막 남은 ‘증발 직전의 샘물’이었다. 등매진료소는 유포1리 등 5개 마을(617명)의 건강을 책임졌다. 지소장 순회 진료가 없는 평소엔 김소현 혼자 근무했다. 그는 진료소까지도 오지 못하는 주민들의 집으로 한달에 20~30차례 방문 진료를 갔다. “여든살 이상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약 떨어질 때가 됐는데 연락이 없는 경우도 ‘혹시나’ 싶어” 문을 두드렸다. 타지에 사는 자녀들로부터 “우리 엄마 무슨 일 있는지 살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가쁜 목소리로 “급히 와달라”는 전화가 울린 날이 있었다. “119 구급차보다 소장님이 빠르다”는 말에 달려갔을 때 “말벌에 쏘인 80대 남성이 새파란 얼굴로 숨을 못 쉬고 있었”다. 아나필락시스(격렬한 알레르기 반응) 쇼크였다. 응급약을 주사해 위기를 넘겼다. ‘의료의 최전선’에선 “심장 덜덜 떨리는 일들”이 예고 없이 벌어졌다.

“약을 타야 하는데 읍내까지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분들이 많아요. 요양보호사한테 약 좀 받아 와달라고 사정하면 보호사분들이 저한테 사정해요. 그 집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병원 갔다 오는 시간이 더 걸리는데 어떡하냐고요.”

이야기를 듣던 박건희가 메모했다.

“약 배달 서비스 같은 걸 건의해봐야겠네요.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도 고민해볼 만하고요.”

박건희(예방의학 전문의)는 8년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근무하며 라오스·필리핀·피지의 의료 체계 구축을 지원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경기도 감염병관리지원단장으로 활동했다. 2023년부터 평창군의 보건의료원장을 맡았다. 그는 “공공의료를 한다는 생각보다 항상 일차의료(의료전달체계상 환자와 첫 접촉을 뜻하는 ‘1차의료’의 의미뿐 아니라 환자 중심의 지속적·포괄적 건강 관리 강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

평창은 의료취약지 ‘영월권’(영월·평창·정선) 안에서도 ‘조건들’이 가장 열악했다. 영월권의 100㎢당 인구밀도 2943.58명(2023년 기준 국립중앙의료원 헬스맵)은 전국 70개 중진료권 중 밑에서 첫째였다. 영월권에서 최저(영월 3311.31명, 정선 2803.95명)는 평창(2776.77명)이었다.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네번째로 땅(1464.26㎢)이 넓었으나 사람은 시군구 평균(38만1134.63명)의 137분의 1밖에 살지 않았다. 인구 10만명당 의사 수(시군구 평균 98.6명)도 영월(58.93명)·정선(38.01명)보다 적었다(24.59명). 교통 여건 역시 가장 안 좋았다. 도보 15분 거리 내 정류장에서 하루 3회 이상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마을 비율(시군구 평균 91.63%)도 평창(70.53%)은 정선(89.07%)과 영월(83.52%)에 못 미쳤다. 사람이 적고 인프라가 취약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일차의료 실험이 가능하단 뜻이기도 했다.

등매보건진료소 건강증진실 벽엔 5개 마을 주민 617명의 집이 손으로 그린 지도 위에 표시돼 있었다. 이문영 기자
등매보건진료소 건강증진실 벽엔 5개 마을 주민 617명의 집이 손으로 그린 지도 위에 표시돼 있었다. 이문영 기자

무엇보다 ‘연결’

“혈당 수치가 200 이상 지속되면 뇌 기능이 손상돼요. 좀 전에 보셨지만 아버님 수치가 한때 200을 넘겼잖아요.”

봉평보건지소 회의실에서 최정우 가정의학과 전문의(평창군보건의료원)가 설명했다. 정면엔 그가 분석한 한 남성 주민(74)의 건강 데이터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띄워져 있었다.

“그런데 식후에 바로 걸으러 나갔을 땐 어떻게 됐어요? 120 나왔죠. 6주만 꾸준히 하면 인슐린이 건강한 상태로 돌아와요. 어때요? 한번 해보시겠어요?”

주민 부부와 의사 외에 회의실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간호사, 영양사, 운동처방사, 물리치료사 등이 동석했다. 부부의 혈압·당 수치, 생활 습관, 식단, 운동 데이터를 분석한 분야별 전문가들이 두 사람을 초청해 청문회 하듯 꼬치꼬치 물었다. 평창군의 다학제 진료 현장(7월17일)이었다. 이 진료팀이 꾸려지는 데도 적지 않은 ‘변화’가 필요했다.

‘2읍 7면’으로 이뤄진 영월은 군민(3만6296명)의 53.7%(1만9525)가 영월읍 한곳에 몰려 살았다. ‘1읍 7면’의 평창(3만9893명)에선 20.6%(8248명)만 읍 단위에 주소지가 있었다. 밀집지 없는 분산 거주는 평창 보건의료 난제의 핵심이었다. 영월의료원을 읍에 두고 지역 의료의 중심 역할을 맡기는 영월군의 방식으론 평창의 공적 의료 체계 설계가 불가능했다. 의료에 접근하기 힘든 평창 군민들에겐 “무엇보다 ‘연결’이 중요”한 까닭이었다. 박건희는 단체장(심재국 군수)의 지원 아래 사업과 행정·관리 위주로 짜여 있던 시스템을 권역별(평창·봉평·대화·진부)로 재편(지난해 7월)했다. “분리돼 있던 진료와 건강증진서비스를 권역팀 안에서 통합·제공”하려는 시도였다. 보건의료원-보건지소-보건진료소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지소장의 진료소 순회와 기관 간 협업이 가능해졌다. 팀이 함께하는 다학제 진료도 시작할 수 있었다.

“알려주신 대로 운동하면 헬스장은 따로 안 다녀도 돼요?”

부부가 묻자 김명성 운동처방사가 답했다.

“운동 습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다니시는 게 좋아요.”

“잡곡을 먹어야 하면 백미는 다 폐기해야 합니까?”

“백미만의 고유 기능도 있으니 굳이 버리실 필요까진 없다”고 김지현 영양사는 말했다. 최정우 전문의는 “둘의 차이가 없진 않지만 차라리 식사량을 줄이시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박지유 간호사가 말을 붙였다.

“선생님은 술도 좀 줄이시면 좋겠어요.”

콜레스테롤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믹스 커피는 괜찮은지, 단백질을 늘리는 식단은 어떤 것이 좋은지, 양념 양이 어느 정도여야 혈당에 무리가 덜한지, 주민과 의료진은 구체적인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평창군민들을 괴롭히는 질환은 대도시 사람들의 질병과 결이 달랐다. “극단적인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 탓에 당뇨와 고지혈증이 많고 고된 농사일로 척추가 주저앉거나 근골격계 통증으로 고생”(최정우)했다. “운동시설이 드물어 약에 더 의존하게 되지만 만성질환은 약으로만 다스려지지 않아 다학제 진료가 효과적”이었다.

7월17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봉평보건지소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간호사, 운동처방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등으로 구성된 ‘다학제 진료팀’이 주민 부부를 초청해 두 사람의 건강 데이터를 보며 심층 상담을 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7월17일 오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봉평보건지소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간호사, 운동처방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등으로 구성된 ‘다학제 진료팀’이 주민 부부를 초청해 두 사람의 건강 데이터를 보며 심층 상담을 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진료는 고혈압과 당뇨를 가진 주민들이 ‘스마트 헬스케어’(서울대 의대 연구팀 지원)에 직접 입력한 정보를 토대로 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주민들은 따로 불러 30분 이상의 무료 심층 상담을 했다. 다학제 진료는 의료 자원의 부족을 만성질환 예방·관리에 초점을 둔 일차의료로 대응하려는 안간힘이기도 했다. “의료취약지라 하더라도 도시보다 양질의 일차의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박건희는 믿었다. 중증으로 발전하기 전에 “지역사회에서 예방하도록 일차의료에 투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돈도 적게 든다”는 설득 논리도 갖췄다. 치료와 건강증진, 돌봄을 한 건물에 통합해 마을 주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공종합의원’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안했다.

“원주로 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까, 강릉으로 나가서 병원을 찾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무료로 이런 진료를 받으니까.”

다학제 진료를 마치고 회의실을 나가던 부부가 말했다.

“황송할 만큼 좋았습니다.”

<끝>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