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난 것은 코끼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코끼리가 살던 삼림지역에 살던 청년들은 코끼리 조련사가 되어 제주도에 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음직한 나이의 여동생과 오빠가 이곳에서 함께 돈을 법니다. 이들은 숙식 제공에 8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코끼리들만큼이나 라오스와 타이에서 온 청년들도 렉과 보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했습니다.
관광·벌목노동에 붙들리고상아 밀거래 성행으로야생 코끼리 멸종위기 처해제주도 쇼코끼리 9마리마른 몸에 갈고리로 찔려가며1회당 50분 공연 강행군‘통디’가 갑자기 쓰러졌다쇼였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다코끼리는 바나나를 코로 받아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이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람을 밟지 않고 건넜다. 마이크를 쥔 여성 사회자가 관객들을 안심시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남아에서는 코끼리 발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타이에서 온 코끼리 보호운동가 생두언 차일럿(닉네임 렉·51)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전통은 없어요. 화가 난 코끼리가 사람을 밟으면… 순간이에요.”
12일 렉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의 한 코끼리 공연업체를 찾았다. 그는 타이에서 코끼리 쇼나 트레킹, 구걸을 하는 데 동원되거나 벌목 노동으로 학대받는 코끼리를 구조하는 일을 한다. 1992년부터 이동 코끼리 병원인 ‘점보 익스프레스’를 운영하며 거리의 코끼리들을 치료하는데, 어떤 때는 4000~5000달러에 불쌍한 코끼리들을 사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구조된 코끼리 330마리는 치앙마이에 있는 2㎢ 면적의 ‘코끼리자연농원’에서 산다. 코끼리자연농원에 갔다 온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공동초대로 렉과 자연농원의 홍보대사인 영화배우 벤짜시리 와타나(닉네임 보·30)가 한국에 코끼리를 보러 온 것이다.
제주도의 코끼리 공연업체에는 쇼를 하거나 사람을 태우고 ‘트레킹’을 하는 코끼리가 9마리 산다. 서울대공원 등 다른 동물원의 14마리를 포함하면, 국내에는 최소 20여마리의 코끼리가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끼리가 처음 한반도 땅을 밟은 건 1411년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 기록을 보면, 일본 아시카가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낸다. 생전 본 적이 없는 동물을 어떻게 할지 난감해하던 조정은 병조 소속의 말 목장을 관장하던 관청 사복시에 이를 맡긴다. 하지만 2년 만에 관리들은 손을 들고 왕에게 보고를 올린다. “코끼리가 양식을 수백 석 소비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바다의 섬에 놓아 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윽고 코끼리는 전라도 순천부 장도에 보내졌다. 하지만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가 슬퍼한다는 소식을 보내온다.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부짖으며 나날이 말라갑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왕이 “멀리 고국을 떠나 이향의 땅에 있는 것은 가련한 일이니 육지로 데려와서 기르도록 하라”며 코끼리를 불렀고, 그 뒤 코끼리는 따뜻한 전라·경상·충청도가 나눠 길러 10년 이상 산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도의 쇼 코끼리들은 타이 옆나라 라오스에서 왔다. 코끼리의 국외 반출은 세계적으로 엄격하게 통제되지만 라오스에선 제약이 덜하다. 쇼가 시작되자 전문가용 카메라로 코끼리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기록하던 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끔찍해요.”
등뼈가 드러날 만큼 코끼리들은 앙상했다. 자연상태의 코끼리는 다양한 종류의 풀과 과일, 나무껍질을 먹는다. 특히 많은 양의 무기염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글에 사는 코끼리들은 진흙을 먹으며 염분을 섭취한다. 하지만 라오스에서 왔다는 젊은 조련사는 이곳의 코끼리에게 마른풀만 먹인다고 말했다.
발도 건강하지 않았다. 코끼리의 발은 수분이 충분한 땅을 걷는 데 적합하다. 반면 콘크리트 바닥은 관절에 무리를 준다. 코끼리에게 발 질환은 목숨을 앗아갈 만큼 위험해 자연농원에서는 발 전문 수의사를 따로 두기도 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맞춰 우스꽝스런 동작을 하는 것도 소음을 싫어하는 코끼리에겐 스트레스다. 뭉뚝하게 잘린 상아를 보면 자신감도 잃는다.
렉은 모든 쇼가 그렇듯 이 업체의 조련사가 ‘불훅’(bullhook·코끼리를 길들일 때 쓰는 뾰족한 갈고리)으로 코끼리 몸을 찌르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업체 관계자는 라오스에서 순치된 코끼리를 들여왔지만 쇼를 꾸준히 하도록 간단한 훈련은 한국에서 가르친다고 말했다. 보통 항문, 귀 뒷부분 등 피부의 부드러운 부분을 찌른다. 불훅에 찔리면 감염위험이 높고 무력해진다.
코끼리 뇌는 무게 5~6㎏으로 상당히 발달했다. 유인원, 돌고래 등과 함께 자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코끼리들은, 암컷 중심의 집단생활을 하며 장례를 지내는 등 죽음을 애도한다. 하지만 약 2년 전에 라오스에서 제주도로 데려온 어린 코끼리(5살 추정) 세 마리는 엄마가 없었다. 2001년 들여온 어른 코끼리들도 한국에 와서 임신한 적이 없다. 덥고 습한 곳에 살던 라오스 코끼리에게 담요로 만든 겨울용 내복을 해 입힐 뿐이다.
치앙마이 북쪽에서 태어난 소수부족 출신의 렉도 어려서부터 코끼리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가 옆 부족 우두머리의 아들을 고쳐준 대가로 받아온 늙은 암컷 코끼리 ‘코디’가 그녀의 첫 코끼리였다. 렉은 대학 졸업 뒤 1985년부터 여행사 가이드를 했다. 그러던 중 일본 관광객을 태운 코끼리가 쓰러져 숨진 것에 충격을 받고 공정여행을 하는 여행사를 차리고 코끼리 보호운동을 시작했다. 1만4000여마리의 아시아코끼리 가운데 3분의 1이 관광이나 노동 목적으로 갇혀 있다.
코끼리 학살은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아프리카로 진출하면서 시작됐다. 상아 때문이다. 1989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상아 교역을 불법화한 조약이 발효됐다. 그러자 밀렵이 늘었다. 60년 전 500만마리이던 아프리카코끼리는 이제 47만마리만 남았다. 케냐의 코끼리보호단체는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야오밍을 앞세워 반대 캠페인을 할 만큼 상아의 70%는 중국과 타이 등 아시아에서 소비된다. 지난 7월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 교역에 관한 협약(CITES)’ 회의에서는 자연사하거나 인간이나 환경에 위협을 가해 사살당한 코끼리의 경우 상아 거래를 허용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내년 타이에서 열리는 당사국 총회에서 최종 결정되는데, 국제 환경 이슈로 번지고 있다.
50분 동안 코끼리들은 쉬지 않고 쇼를 했다. 코로 훌라후프를 돌리고, 흰 종이에 붓으로 점을 찍고, 사람을 안마하고, 농구공을 던지고, 볼링핀을 쓰러뜨렸다. 공연의 마지막 순간 농구를 하던 코끼리 ‘통디’가 쓰러졌다. 깜짝 놀라 공연장 안으로 뛰어들려고 한 사람은 렉과 보뿐이었다. 약속된 연기였다.
렉이 말했다. “이런 쇼를 보면 동물이 나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이기심을 배울 뿐이죠. 책임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보여주지 마세요. 업자들은 우리가 지급한 돈으로 동물을 다시 사들일 겁니다.”
종일 사람을 태우고 트레킹을 하는 코끼리의 코를 렉이 쓰다듬었다. 눈 옆이 움푹 꺼진 나이 많은 코끼리도 부릅뜬 눈을 스르륵 감았다.
제주/글·사진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