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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중에는 ‘따뜻한’ 의사도 있고 ‘차가운’ 의사도 있다. 의사 집단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픽사베이
의사 중에는 ‘따뜻한’ 의사도 있고 ‘차가운’ 의사도 있다. 의사 집단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픽사베이

6월18일 엠비시(MBC) 100분 토론은 의정갈등을 다루었다. 개인적으로 이 토론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의사 집단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두 시선을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한쪽은 의사를 환자 생명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이로, 다른 한쪽은 의사를 자기 이득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쟁점 중 하나가 되었던 ‘의료사고처리 특례법’을 양쪽이 그려내는 방식을 다시 써 보자.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최선을 다하다가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의사에게 책임을 물으면 생명과 관련한 업무는 어떤 의사도 맡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지금 논의 중인 특례법은 사망사고를 빼고 다른 사고에 대해서만 의사 책임 면제를 검토하고 있는데, 사망사고를 빼면 법은 유명무실하다.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그에 맞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업무상 과실이 발생하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이에게 어떻게 책임을 면제하는 조항을 만들 수 있는가. 해당 특례법이 12대 중과실을 제외한 사고에서 보험 가입자의 경우 운전자에게 소를 제기할 수 없음을 규정한 교통사고 특례법과 유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의료 상황과 운전 상황이 어떻게 동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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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양측의 주장은 모두 옳다.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두 주장이 모두 옳을 수 있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양쪽이 생각하고 있는 의사, 진료, 사고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은 사고가 불가항력으로 발생한 불운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으며, 다른 쪽은 사고가 부주의 또는 다분히 고의성을 띤 악한 의도 및 행위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두 논의가 평행선을 긋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철학이라면, 이런 논의를 공통의 지반이 없는 ‘통약불가능’한 주장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양쪽이 아예 다른 말을 하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서사학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상황에 접근한다. 서사의 눈으로 보자면, 둘은 같은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는 수사(修辭)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두 이야기에는 빈 부분들이 있고 이를 듣는 청자는 사전에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형식들을 서사 이해에 활용하게 되는데, 이때 사람들이 어떤 원형을 떠올리는가에 따라 서사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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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론부터 설명해서 내용이 복잡해졌다. 아주 간단한 예로 위 내용을 살핀 다음, 다시 현 상황으로 돌아오자.

의정갈등에서 한쪽은 ‘따뜻한’ 의사의 서사를, 다른 한쪽은 ‘차가운’ 의사의 서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중에서. 출처: 티비엔(tvN)
의정갈등에서 한쪽은 ‘따뜻한’ 의사의 서사를, 다른 한쪽은 ‘차가운’ 의사의 서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중에서. 출처: 티비엔(tvN)

서사적 원형이 인식에 미치는 영향

우리는 정치인에서부터 연예인까지, 여러 인물에 대해 경합하는 이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예컨대,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특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도, ‘권력을 추구하여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독재자’로도 인식되는데, 이것을 한국 근대사의 인식에 따른 이해의 차이로도 볼 수 있지만 대중이 그를 이해하기 위해 적용하는 이야기의 원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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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쪽은 전통적인 가부장 신화, 이를테면 단군 신화에 기대어 그를 이해하려 한다. 가부장 신화에서 가족을 대표하는 아버지는 외적 요소를 도입, 통제하여 내적인 안정과 발전을 가져오는 인물이다. 마치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과 호랑이의 경쟁에 쑥과 마늘이라는 과제를 내 주어 상황을 정리하고 결속된 국가 공동체를 탄생시킨 것처럼, 이승만 또한 미국에서 건너와 남북 경쟁에서 민주주의 확립이라는 과제로 상황을 정리하고 국가를 출범시킨 인물이므로,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진보 쪽은 독재자 서사, 이를테면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서사에 기대어 그를 이해하려 한다. 히틀러는 독일 제국을 만들기 위해 내부에 가상의 적을 만들고,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한편 혈통적 순수성을 강조하여 국가적 힘을 결집해 나갔다. 히틀러처럼 이승만 또한 공산주의를 배격하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는 한편, 민족진영 강화를 위해 민족 순수성을 강조하고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등 ‘반공’ 결집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 이승만을 달리 평가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이런 결정은 역사에 대한 정밀한 평가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사학의 결과물을 접하기 어렵고, 일반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노고와 두꺼운 논문집보다 대중 문화와 일상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묘사다. 그리고 그 묘사를 지배하는 것은 배경에 있는 원형 서사다.

논쟁적인 인물이라 이렇게 해석해선 안 된다면, 최근의 일을 떠올려보아도 좋겠다. ‘하이브 대 민희진’ 사건에서 민희진 대표의 1차 기자회견 전후의 상황 말이다. 초기 하이브가 민 대표에게 경영권 탈취 및 배임 혐의를 씌울 때, 민 대표에겐 마녀 서사가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는 회사 몰래 잘 나가는 회사를 분사하여 자신이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음모를 뒤에서 꾸미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무속인과 상의하는 등 주술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는 설명이 붙었다. 그런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쉬운 서사는 마녀다. 계략과 획책, 심지어 주술까지 사용하여 현실을 뒤집으려 악한 일을 벌이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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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 대표가 초록색 스트라이프 티와 파란색 모자를 눌러쓰고 장장 세 시간의 기자회견을 했을 때, 상황은 뒤집어졌다. 그는 자신을 아저씨들의 못나고 결핍된 경영에 핍박받는 뉴진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닌 이모로 묘사했고, 그 설명은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녀였던 민 대표는 한순간 케이-장녀(K-장녀)로 변신한다. 가부장이 잘못 끌어 나가고 있는 가족을 어떻게든 건사하기 위해 몸을 갈아 넣는 존재로, 동생과 조카들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는 이로.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따뜻한’ 의사와 ‘차가운’ 의사가 동일 인물 속에 공존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사다. 출처: 아이엠디비(IMDb)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따뜻한’ 의사와 ‘차가운’ 의사가 동일 인물 속에 공존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사다. 출처: 아이엠디비(IMDb)

의사 집단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서사적 원형의 힘은 강력하고, 이는 법적 결정이나 사회적 논의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저명한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법과 문학의 관계를 논한 ‘시적 정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문학적 상상력은 공적 합리성의 한 부분”이다. 물론 서사가 법을 좌우하고 정책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인지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또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하고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잘 알고 있는 서사를 활용하는 경우가 엄청 많다는 것, 그렇기에 현재 논의에서 사람들이 끌어들이는 서사가 무엇인지 살펴 따져보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일 뿐이다. 다시 누스바움을 빌어 “제도 그 자체는 ‘공상’의 통찰력으로 인도”된다.

다시 의정갈등으로 돌아오자. 양쪽의 주장은 어떤 서사에 기대고 있는가. 감히 정리해 보자면, 한쪽은 ‘따뜻한’ 의사의 서사를, 다른 한쪽은 ‘차가운’ 의사의 서사를 배경에 깔고 있다.

‘따뜻한’ 의사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범형(範型)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이들을 가리킨다. 환자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환자의 편에 서서 질병이라는 거악에 맞서 싸우는 인물. 워낙 상대의 힘이 커서 때로 패배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의 힘이나 주변의 지원이 부족해서일 뿐 결코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이들, 병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는 영웅인 의사들에게 어떻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반면 ‘차가운’ 의사는 영화보다 뉴스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의 서사를 가리킨다. 유령수술, 성범죄, 과대진료, 마약 등 자신의 이득을 위해선 눈 깜짝하지 않고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의사. 그에겐 환자의 어려움이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오로지 그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영달 뿐. 그가 쥐고 있는 메스의 차가움만큼이나 냉혈한 그들은 그 자체로 악이다. 얼마든지 악할 수 있고 이미 악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족쇄다.

이렇게 놓고 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쪽이 맞느냐가 아니다. 둘 다 의사 집단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의사 중에는 ‘따뜻한’ 의사도 있고 ‘차가운’ 의사도 있다. 심지어, 같은 인물 속에도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할 수 있다. 현실을 무시하고 집단을 동질한 것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논의는 문제를 올곧이 해석하여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기는커녕 변죽을 울리는 것에 그치고 만다.

물론 의사 집단에 어떤 전형을 요구할 수 있다. ‘좋은 의사’의 상을 제시하고 이런 모본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전문가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적절한 방식 중 하나이며, 최근의 윤리 이론 중 하나가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책을 세우고 결정함에 있어 우리가 가진 전형(스테레오타입)에 매몰된 채 주장만 내세운다면, 제대로 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미 나는 다른 지면에서 몇 번이나 ‘영웅’ 의사 서사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한편 의사를 모두 악당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그들을 전문직으로 두나. 그렇다면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처럼 빨리 전문직의 경계를 해체하고 시장에 의료를 맡기는 것이 옳다. 그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둘 다 옳다고 말하며 시작했지만, 사실은 둘 다 틀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사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반응할 수 있는 사회적, 정책적 접근이지, 이들을 무 자르듯 하나로 놓고 다루는 둔탁한 논의가 아니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