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5일 오후 백화원 송별 연회를 끝낸 김대중과 이희호는 순안공항으로 향했다. 도착 때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이 김대중과 동승했다. 평양 시민 수십만명이 나와 꽃술을 흔들며 환송했다. 김일성종합대학교 앞에서 김대중과 김정일이 잠시 차에서 내리자 시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오후 4시가 넘어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이별의 악수를 했다. 김정일이 김대중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세 번 포옹했다. “우리는 김정일 위원장을 다시 만날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어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트랩에 올랐다. 김정일이 손을 흔들었다. 김대중과 이희호도 김정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평양에 54시간 머물렀어요. 남편은 김정일 위원장과 11시간 동안 자리를 함께했어요.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국제사회에 알렸지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6월15일 오후 5시24분 서울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도착하니 많은 시민들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어요. 실향민들도 나왔고요. 강남대로와 시청 앞을 지나 청와대로 가는 길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지요.” 여론조사 결과는 정상회담 지지 의견이 90%를 넘었음을 알려주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올 때 김정일 위원장이 풍산개 두 마리를 선물했어요. 우리는 북쪽에 진돗개 한 쌍을 선물했고요. 풍산개 이름을 ‘우리’와 ‘두리’라고 지어 주었어요. 퇴임할 때 서울대공원에 기증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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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따라 남과 북에서는 남북교류사업이 하나하나 진행됐다. 2000년 9월18일 분단 이래 반세기 동안 막혀 있던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서명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따라 남과 북에서는 남북교류사업이 하나하나 진행됐다. 2000년 9월18일 분단 이래 반세기 동안 막혀 있던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서명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7월29일부터 31일까지 남북정상회담 이후 처음으로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남과 북은 경의선 철도 연결을 포함한 여섯 항목에 합의했다. 8월5일 한국신문협회(회장 최학래)와 한국방송협회(회장 박권상) 소속 언론사 사장단 48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8월11일 언론사 사장단은 북한 언론기관과 함께 “남과 북의 언론사들과 언론기관들은 새롭게 조성된 정세의 흐름에 맞게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저해하는 비방 중상을 중지하기로 한다”는 합의문을 내놓았다.

8월15일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 이후 15년 만의 만남이었다. 남쪽의 이산가족 102명이 평양에서 북녘의 가족들과 재회했다. 북쪽 이산가족 101명은 서울에서 남쪽에 있는 가족 750명을 만났다. “남편과 나는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청와대에서 텔레비전으로 봤어요. 나이 든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도 많이 울었어요. 남편은 대통령 되기를 잘했다고 했지요. 평양에 간 보람이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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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북한의 특사 김용순이 남북직항로를 이용해 서울에 왔다. “김용순 비서가 김정일 위원장이 보내는 추석선물로 칠보산 송이버섯을 싣고 왔어요. 10㎏짜리 300상자나 됐어요. 북한 사정이 어려운데 그 많은 선물을 받으니 좀 미안했지요. 김용순 비서는 전직 대통령, 여야 대표를 포함해 송이버섯을 선물할 사람 명단을 가지고 왔어요. 통일부에서 송이버섯을 나누어 주었지요.”

남북공동선언이 일으킨 평화 물결이 퍼져 나갔다. 2000년 9월15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제27회 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식에서 남과 북의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입장했다. 개막식장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11만 관중이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다. 남과 북의 화해를 세계에 알리는 장면이었다. 9월18일 임진각 ‘자유의 다리’ 앞에서 경의선 연결 기공식이 열렸다. 1945년 9월 운행이 중단된 뒤로 55년이나 버려졌던 철길을 다시 잇는 역사적인 행사였다. 반도의 고립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아가는 ‘철의 실크로드’를 닦는 일이었다. 9월24일 북한 인민무력부장 김인철과 북한 대표단이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하러 남한에 왔다. 북한군 수뇌부가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김인철 인민무력부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어요. 북한 군부가 청와대에 와서 대통령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느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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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의 관계도 화해 국면으로 급속히 옮겨갔다. 10월9일에는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이 미국을 방문했다. 조명록은 대통령 클린턴을 예방하고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방장관 윌리엄 코언과 연쇄 회담을 했다. 조명록과 올브라이트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는 ‘북·미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한반도에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협정체제로 바꿔 한국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했다”고 밝혔다.

2000년 12월10일 김대중은 마침내 한국인 최초이자 100번째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됐다. 베르예(왼쪽) 선정위원장은 “상을 주라는 로비는 없었고 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는 있었다”며 한국내 일부 반대 세력의 주장을 일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2월10일 김대중은 마침내 한국인 최초이자 100번째 노벨평화상의 주인공이 됐다. 베르예(왼쪽) 선정위원장은 “상을 주라는 로비는 없었고 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는 있었다”며 한국내 일부 반대 세력의 주장을 일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0월13일 오후 6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시각 청와대 관저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노벨위원회 선정위원장 군나르 베르예가 나와 발표문을 읽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한국과 동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및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한국의 김대중을 선정했다. 한국에서 수십년 동안 지속된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계속된 생명의 위협과 기나긴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의 대변자였다. 그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들었다.” 노벨위원회는 김대중이 아시아 인권과 평화의 수호자로 활동한 사실을 강조하고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주목했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한 사이의 50년 이상 지속된 전쟁과 적대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북한 방문은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주요 동력이 됐다. 이제 한반도에는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이 싹트고 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기쁨의 포옹을 했다. “남편은 1987년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추천으로 후보에 오른 뒤 14년 동안 계속 후보로 추천됐어요. 남편은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여러 차례 떨어졌다가 됐는데, 노벨평화상도 그랬어요. 2000년은 노벨평화상 제정 100돌 되는 해여서 특히 경쟁이 심했다고 해요. 단체 35곳과 개인 115명이 후보로 올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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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언론은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크게 보도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에서 김대중의 수상을 ‘아시아 민주주의의 승리’로 다루었다. “김대중씨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인종·지역·문화를 떠나 인류 보편의 가치이자 소망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도 전화로 김대중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 세상에서 대통령님만큼 이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넬슨 만델라도 축하 전화를 했다.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존경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10월20일 서울에서 열린 아셈(아시아·유럽정상회의)에서도 각국 정상들은 김대중의 수상을 축하했다.

반면에 국내 일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야당과 보수 언론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을 반대했어요. 야당 지지자들이 노르웨이에까지 반대 편지를 보냈고요. 수상이 결정된 뒤에도 노벨상을 받으려고 돈으로 로비를 했다는 말을 퍼뜨리기도 하고, 나라가 어려운데 시상식에 참석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고요. 수십년 동안 당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을 겪으니 가슴이 아팠지요.”

노벨상 수상자 발표 뒤 선정위원장 베르예는 언론 인터뷰에서 노벨상 수상 로비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노벨상을 받으려는 로비가 아니라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고 밝혔다. 베르예는 “노벨평화상이 로비로 받아 낼 수 있는 상이라면, 과연 그 상이 세계 제일의 평화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한국 동포들은 인터넷에 글을 올려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이후로 한국인들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한국이라면 넌더리를 내고 있다.” 노르웨이 현지 신문은 수상자 선정과 관련해 “과거에는 이런저런 자격 시비가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단 한 건의 반대 의견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2000년 6월15일 김정일 공항까지 환송 “트랩밑 손흔들던 모습이 마지막될 줄은”서울오니 환영 물결 ‘90% 이상’ 지지 8월15일 15년만에 이산가족 상봉 ‘눈물’ “남편은 대통령 되기를 잘했다고 했죠” 9월 시드니올림픽 남북 첫 동시입장 ‘감동’ 55년만에 경의선 남북연결 기공식도 10월13일 노벨위원회 수상자 선정 발표“관저에서 티브이 뉴스 보며 기쁨의 포옹” 선정위원장 “상 주지 말라는 로비 받았다” 중국 언론 “노벨상 절반은 부인 몫” 논평도

10월23일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평양을 방문했다. 올브라이트는 금수산궁전을 참배한 뒤 오후에 국방위원장 김정일과 장시간 만났다. 올브라이트의 김정일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그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대화 상대자였다. 실용주의적이고 결단력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11월7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초박빙의 승부였다. 플로리다 재검표까지 거쳐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민주당의 앨 고어를 밀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클린턴은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 했지만 임기 말에 중동평화협상 문제가 겹쳐 결국 방북을 포기했다. 클린턴은 김정일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상황이 그렇게 되어가는 걸 몹시 안타깝게 생각했지요.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갔거나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다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남북관계도 엄청난 변화를 맞았을 거예요.”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김대중은 노르웨이 왕실가족을 비롯 전세계 저명인사 1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 연설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김대중은 노르웨이 왕실가족을 비롯 전세계 저명인사 1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상 연설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2월10일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김대중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이희호는 민주화운동 동지를 비롯한 54명의 한국 수행원과 큰며느리 윤혜라
2000년 12월10일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김대중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이희호는 민주화운동 동지를 비롯한 54명의 한국 수행원과 큰며느리 윤혜라

 셋째 김홍걸 부부 등 가족들과 함께 객석에서 영광의 순간을 지켜봤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셋째 김홍걸 부부 등 가족들과 함께 객석에서 영광의 순간을 지켜봤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000년 12월8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함께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했다.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5·18재단 이사장 윤영규, 이문영·한승헌·한완상·이해동을 비롯한 54명이 동행했다. 노벨상 수상 반대 움직임은 오슬로까지 따라왔다. 민주노총 일각에서 김대중 정부가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하고 은행 파업을 공권력을 동원해 해산시켰다며 노벨위원회 위원들과 면담을 요청했다. 노르웨이 노총도 김대중의 해명이 없으면 항의 집회를 열겠다고 했다. 김대중은 노르웨이 노총 위원장을 만났다. “남편이 대통령이 된 뒤 전교조·민주노총을 합법화하고 민주노동당이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남편은 그런 사정을 상세히 이야기했어요. 세계 어느 민주국가도 폭력을 쓰는 불법파업을 용인하지는 않는다는 설명도 하고요. 노르웨이 노총 위원장이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풀어주어 고맙다고 했어요. 남편과 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고 해서 사진도 찍었지요.”

12월10일 낮 12시 오슬로 시청에서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김대중과 이희호 일행이 시청 후문 앞 광장에 도착하자 어린이 2000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김대중에게 ‘평화의 횃불’을 건넸다. 김대중은 분쟁지역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물에 불을 댕겼다. 소년소녀들이 ‘어린이를 구하소서’를 불렀다. 시청 중앙 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노르웨이 총리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를 비롯한 각국 인사 1100여명이 김대중과 이희호를 맞았다. “중앙 홀이 온통 노란색 꽃이었어요. 보통은 붉은색 장미로 꾸미는데 햇볕정책을 상징하느라고 그런 관례를 깨고 노란 해바라기로 장식했다고 해요.”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예가 선정 이유를 발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5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전선 너머로 협조의 손길을 뻗으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의 의지는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너무 자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까지의 노정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수십년 동안 그는 권위주의 독재 체제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김대중씨가 간직한 불굴의 정신은 국외자들에게는 거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한층 더 진지한 면이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 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 마지막 냉전의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어 김대중이 수상연설을 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바쳐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 노벨상은 영광인 동시에 무한한 책임의 시작입니다.” 시상식이 끝난 뒤 하랄 5세가 김대중 일행과 노벨위원회를 초청해 오찬을 열었다. 노르웨이 국왕이 수상자를 초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중국 인민일보사가 내는 잡지 <스다이차오>는 이희호를 주목해 이렇게 논평했다.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 해온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 한국피아르(PR)협회는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경제적 효과가 19억달러(약 2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남편은 노벨상 상금 11억원 중 3억원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기증했지요. 나머지 8억원은 해마다 12월에 이자를 받아 불우이웃 돕기와 국외 민주화운동 지원에 써왔고요.”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현지 한인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현지 한인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노르웨이에서 돌아온 뒤 그해 12월25일 이희호는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로 뽑혔다. 펄 벅 인터내셔널은 “민주화운동에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아동과 여성의 권익에 앞장서 왔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이희호를 뽑은 이유를 밝혔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