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영래를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여름이었다. 이른바 긴급조치 1·4호 위반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를 통해 조영래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조영래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지학순 주교가 마련한 돈을 김지하로부터 받아 서울대생 나병식과 서중석에게 활동자금으로 전달했다는 혐의로 수배중이었다.
물론 나는 일찍부터 그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고교 3학년 때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고교생들을 이끌고 참여한 전력이며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들어간 수재인데다 71년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의 주동인물이었다는 것 등등 그는 유명인이었다.
만나보니 과연 그는 백석정한(白晳精悍)한 사람이었다. 항상 신중했던 탓에 다소 어두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탁월한 식견과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후 70년대 내내 그와 나의 은밀한 만남은 계속되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그때 그는 백련사 부근 단칸방에서 훗날 아내가 된 이옥경과 함께 힘겨운 수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살림은 물론 어려웠다. 보람도 있으면서 돈벌이가 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틈이 나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일을 맡아서 했다. 유신독재가 패망할 때까지 내내 그는 그렇게 숨어서 엄청난 일을 해냈다.
그중에서도 <전태일평전>을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이 땅에 남긴 업적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태일에게, 전태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전을 쓴 것으로도 모자라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이라는 시까지 써서 세상에 돌렸다.
80년 초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조영래는 2월23일 오래 미뤘던 결혼식을 올린다. 주례는 홍성우 변호사였다. 그는 71년 구속으로 쫓겨났던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했고, 대학원에도 복귀했다.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공해소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입증에 관한 연구’. 그는 이때 이미 시대의 새로운 징표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83년 봄 그는 마침내 변호사로서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대한일보 빌딩에 연다. 사무실은 곧 고교 동창 유영구의 도움으로 명지빌딩으로 확장·이전한다.
84년 9월 서울시를 상대로 한 망원동 유수지 붕괴사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시민’과 ‘공익’이라는 그의 지향성을 상징한다. 그때 수해를 입은 망원동 8만여명의 주민들을 대리한 소송은 대법원이 서울시의 상고허가 신청을 기각함으로써 장장 5년10개월 만에 종료됐다. 이는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소송 사건이자 무책임 행정에 대한 시민의 첫 승리였다. 85년 3월 미혼여성 노동자의 교통사고 사건을 통해 여성 25살 조기정년제를 파기하는 판례를 만들어냈고, 연탄공장의 석탄분진에 의한 진폐증 손배소송에는 헌법 속에 잠자고 있던 환경권을 법정으로 끌어내 승소했다. 변론 외에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 참고자료 제출 등 최선을 다하는 조영래의 변론 행태를 일컬어 ‘창조적 변론’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영래 변론의 백미는 ‘권인숙양 사건’이 아닐 수 없다. 86년 7월 부천공단에 위장취업했던 서울대 제적생 권양이 부천경찰서 문귀동에게 ‘성고문’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신구 교회와 변호사들이 구성한 대책위에서 조영래와 박원순이 실무를 맡고 이돈명·조준희·홍성우·황인철이 외연을 담당했다. 조영래는 의분과 정의감으로 실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해 10월3일 권양의 주민등록증 위조에 대한 재판 때 그가 작성한 변론 요지서는 명변론에 명문이었다. “이제 잔혹했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권양은 이 법정에 섰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눈물로써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이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순결무구한 처녀는 이 시대의 모든 죄악과 타락과 불의를 속죄하는 제물로서 역사의 제단 앞에 스스로를 바쳤으며,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시대에서 가장 죄가 없는 이 처녀를 더 이상 단 한시라도 차디찬 감옥 속에 갇혀 있게 하는 죄악의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조영래의 변호사 활동은 7년간에 불과하지만, 사법사에 남긴 족적은 누구보다 뚜렷하다. 86년 5월1일 법의 날에 맞춰 발간된 <인권보고서>는 초유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법회 출범과, 이를 확대 발전시킨 88년 5월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결성도 그의 열정이 빚어낸 민주화의 결정체들이다.
조영래와 불교의 인연도 깊다. 그는 대학시절 서울법대의 불교학생회와 척사회에 깊이 간여했다. 최근에야 우연히 한 불교 잡지에 쓴 그의 글을 발견하기도 했다. “근 30년이 가까워 오도록 내 마음에서부터 불경을 멀리한 일은 거의 없다. … 그것은 제도로서의 한국 불교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내가 병들었노라’는 유마힐 거사의 그리운 사자후는 오늘 어디 가서 들을 수 있는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백장청규를 지금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86년 명진 스님이 구속됐을 때 그가 변론을 하면서 “한겨울 혹독한 추위 겪고 핀 매화가 코를 때린다”고 게송을 전하자, 명진은 “해가 서산에 지면 달이 동산에 뜬다”로 받았다. 독재정권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청화, 성문, 현기, 원각, 주영 스님과도 교유했다.
아마도 그의 생전에 이루지 못한 가장 안타까운 일은 87년 대선 때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였을 것이다. 후보단일화를 주창한 그는 단일화 국민협의회 결성까지 주동했다.
90년 12월12일 조영래는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43. 요절도 이런 요절이 없다. 그의 유택은 마석 모란공원의 민주열사묘역에 있다. 먼저 간 전태일과 함께. 2004년 4월19일 모교인 서울법대에 ‘조영래 기념홀’이 자리했다. 최종길 교수 기념홀에 이어 두번째다. 그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