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5·3’ 인천사태 배후 주동 혐의로 구속됐다 88년 12월 공주교도소에서 석방되는 장기표 민통련 사무차장(오른쪽 두번째)을 김근태 민청련 의장(왼쪽)이 환영하고 있다. 85년 붙잡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 의장은 그해 6월 김천교도소에서 먼저 풀려난 상태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5·3’ 인천사태 배후 주동 혐의로 구속됐다 88년 12월 공주교도소에서 석방되는 장기표 민통련 사무차장(오른쪽 두번째)을 김근태 민청련 의장(왼쪽)이 환영하고 있다. 85년 붙잡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 의장은 그해 6월 김천교도소에서 먼저 풀려난 상태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⑪ 수배자들의 고난

‘민청학련 주범’ 유인태의 수기

“1974년 4월14일 나는 장승배기에서 안양로(서울대 정치학과 68학번)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삼선동 한성여고 앞의 산동네였다. … 안양로가 묵는 문간방 유리창을 두드리자 한참 뒤 주인집 고3 아들이 내다보더니 좀 놀라는 기색이었다. 대문을 따주나 했더니 조금 지나 그 학생과 누이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와 같이 나왔다. 아주머니는 “양로 학생 요 앞에 나갔으니 들어와 잠시 기다려요” 하고는 자식들을 향해 “나 요 앞에 마실 갔다 올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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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 학생에게 “자네, 나 수배된 것 아나?” 했더니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했지?” 하고 물으니까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차 싶어 얼른 발길을 돌려 10미터쯤 갔을까, 바로 앞 계단으로 앞에총을 한 정복경찰 6명이 사복에 인솔되어 나타났다. 순간 호주머니에서 며칠 전에 샀던 도수 없는 싸구려 안경을 꺼내 쓰고는 앞으로 걸었다. 뒤에서 “바로 저 사람이에요” 하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꼬불꼬불한 계단을 정신없이 내리뛰어 큰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저놈 잡아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뛰어 동도극장 뒤쪽에서 빈 택시를 잡아 오르는 순간 앞이 노래지고 구역질이 나 그대로 뒷자리에 누워버렸다.

유인태 학생에 “신고했지” 물으니고개를 끄덕거렸다아차 싶어…10m쯤 갔을까정복경찰 6명이 나타났다

기본요금 거리만 가서 일단 내려 택시를 갈아타고 중랑교 유홍준(서울대 미학과 67학번) 집으로 갔다. 그의 부모는 바로 조금 전까지 형사들이 잠복하다 나갔는데 어떻게 무사히 왔냐고 하시면서, 어차피 무사히 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홍준이 아버지와 같이 나가다가 잡히면 자수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잡히지 않았지만 피할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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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미아리 우리집에서 한 정거장 전 부근에 있는 빵집에 와서 성북동 절에서 고시 공부 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귀향했다는 얘기였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밖에서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당신, 유인태지?” 하며 그는 수갑을 채웠다. 1분도 안 되어 검은 지프에 실려가는 도중 “어이, 김 형사! 우리 공동체포야” 하고 한 형사가 말했다. 3명이 특진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북부경찰서 3층의 정보과로 올라가는 계단 벽마다 내 사진이 붙어 있었다. ‘현물’을 인도받은 정보과장은 “만세!”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일단 남산 중앙정보부 분실로 실려갔다. 이로부터 나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4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1974년 4월-실록 민청학련2>에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전국에 현상수배되어 쫓기던 유인태의 수기에는 수배자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넓은 천지에 내 한 몸 받아줄 한 평 공간이 없다는 그 처연한 심사는 수배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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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이래 군사독재정권은 수많은 정치범들로 하여금 거리를 방황하게 했다. 사건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조작된 사건일수록 수배자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속담에 ‘매는 일찍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정치 수배자에게는 늦게 잡히는 편이 낫다. 먼저 잡히면 연루자와 혐의 내용을 내 입으로 불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을 피할 수 없는데다, 십중팔구 고문을 당할 위험도 훨씬 더 큰 것이다. 반면에 늦게 잡히는 사람은 이미 조사가 끝난 뒤라 다만 자신의 혐의 내용만 확인해주면 된다.

흔히 수배생활을 가리켜 ‘잠수함을 탄다’고 말했는데, 잠수함 타기란 정말 어렵다. 갈 곳도 오라는 곳도 물론 없다. 우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위험물이어서 남한테 피해를 입혀야 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괴롭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공무원의 집은 삼가야 하고, 친소관계가 노출된 사람을 피해야 하며, 가급적 자주 옮겨야 한다. 나 자신 그 시절 수차례 수배자로 떠돌아야 했다.

 김효순(가운데·전 <한겨레> 대기자)의 졸업 기념사진. 둘째줄 왼쪽은 제정구(작고)·뒷줄 맨오른쪽은 유홍준 전 문체부장관. 이들 대부분은 두 달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거나 수배됐다.
김효순(가운데·전 <한겨레> 대기자)의 졸업 기념사진. 둘째줄 왼쪽은 제정구(작고)·뒷줄 맨오른쪽은 유홍준 전 문체부장관. 이들 대부분은 두 달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거나 수배됐다.

장기표·조영래·김근태의 수배생활

70년대와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수배자를 돕는 일이야말로 가장 절실하면서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 시기 나는 어쩌다 보니 수배자로 숨어 다니면서 또다른 수배자의 생활비나 은신처를 주선하는 일을 일상처럼 했다. 민청학련 사건 때는 장기표와 조영래가, 그리고 이른바 ‘5·22(오둘둘) 서울대 시위사건’ 이후에는 김근태가 쫓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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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지학순 주교가 마련해준 돈을 김지하로부터 받아서 서중석과 나병식에게 민청학련 활동자금으로 전달했다는 것이 혐의내용이었지만, 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에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활약을 했다.

장기표·조영래·김근태셋은 용케도 잘 피해다녔다조영래는 아내와 단칸방장기표는 결혼까지김근태는 글을 썼다

장기표는 그의 고향 후배이면서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인 김병곤으로부터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는 데 필요하다는 제의를 받고 써준 ‘민중의 소리’가 수배의 직접적인 이유였지만, 그 이전부터 그는 사실상 잠수 상태였다.

조영래와 김근태는 유신기간 내내, 그리고 장기표는 77년 2월25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까지 오랜 세월 용케도 잘 피해다녔다. 조영래는 홍은동 백련사 부근 어딘가에 아내 이옥경과 단칸방을 얻어 생활을 하고 있었고, 장기표는 내가 소개한 전병용(교도관)의 형님집 등을 수시로 옮겨다니다 수배중에 결혼까지 했다.

이들 세 사람의 수배생활은 그들 나름의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장기표는 어느 노동자 부부의 집에 있을 때, 갓 태어난 아기의 똥오줌 기저귀를 도맡아 빨아 널었다. 그 젊은 부부는 늘 죄송해했고 또 그만큼 장기표를 존경했다. 은신처의 학생들에게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정교사였고 멘토가 되었다.

김근태는 청운동 시민아파트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층마다 공동화장실밖에 없는 곳이었다. 주인이 외출한 낮 시간에는 집 안에서 요강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 불편도 끄떡없이 잘 견뎌냈다. 그는 틈만 나면 글을 썼다. 정세분석, 운동론, 편지 등을 쉬지 않고 썼다. 그의 성실성과 지성스러움은 실로 탄복할 만한 것이었다. 이 무렵 손학규도 수도권 선교자금 사건으로 쫓기고 있었는데, 이들은 둘 또는 셋이 만나기도 했다.

1974년 2월 동숭동 시절 서울대 문리대 4·19탑 앞에서 찍은 유인태(앞줄 왼쪽 학사모)
1974년 2월 동숭동 시절 서울대 문리대 4·19탑 앞에서 찍은 유인태(앞줄 왼쪽 학사모)

왼쪽부터 1970년 11월13일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일기
왼쪽부터 1970년 11월13일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일기

수배 중에 완성된 <전태일 평전>

조영래는 수배 상태에서도 김지하의 양심선언, ‘3·1 민주구국선언’의 씨앗이 된 ‘원주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전태일 평전>이다. 전태일과 장기표·조영래의 관계는 70년 11월 전태일의 장례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장기표는 명동 성모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서울법대 학생인데 아드님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찾아왔다”고 하자, 어머니는 “태일이가 평소 대학생 친구 한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토록 말했는데, 죽고 나서야 찾아왔구나” 하면서 반겼다.

장기표로부터 전말을 전해들은 조영래는 사법시험 공부를 중단한 채 ‘전태일 투쟁’에 매달렸다. 11월16일 서울법대 학생총회를 열고, 전태일의 장례식을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치를 것을 결의했다. 이로부터 학생들과 교회의 호응이 잇따랐고 언론이 전태일 사건을 적극 보도하기 시작했다. 노학연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점차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71년 서울대생 내란 예비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확정판결로 72년 12월 석방된 장기표는 맨 먼저 어머니로부터 전태일이 남긴 수기와 일기를 받아 감리교신학대학의 에드워드 포이트라스(한국이름 박대인) 교수에게 부탁해서 가까스로 복사했다.

전태일 평전조영래는 수배중 틈틈이장기표와 이소선을 만나3년에 걸쳐 정리…책은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이때 장기표는 두달 넘게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정리한 노트 3권을 74년 조영래에게 전했다. 그러나 이 자료만으로는 부족해 조영래는 수배중임에도 틈틈이 장기표와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청계피복노조 관계자들을 만나 보충했다. 전태일이 조영래가 되고, 조영래가 전태일이 될 만큼 그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3년에 걸친 집필 끝에 76년 여름 <전태일 평전>을 탈고했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은 78년 11월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내가 조영래로부터 원고를 받아 일본의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의 송영순(바오로)에게 부탁해서 출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나온 책이 <불꽃이여 나를 둘러싸라-어느 한국 노동자의 삶과 죽음>(炎よ わたしを つつめ - ある韓國勞動者の生と死>(김영기 저, 이호배 역)이다. 물론 필자와 역자는 모두 가명이었다. 필자 이름 김영기는 ‘조영래의 영(英)과 장기표의 기(琪)’를 합성한 것으로 조영래의 깊은 뜻이 반영된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어머니>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나는 2009년 8월 전태일재단 개소식 때 이 책과 영화의 필름을 장기표 이사장에게 전달했다. 국내에서는 83년에 민종덕의 주선으로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를 엮은이로 하여 돌베개 출판사에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었지만 상당기간 판금되었다. 90년 가을에야 처음으로 조영래의 실명으로 <전태일 평전>이 증보·출간되었다. 하지만 정작 조영래는 책을 보지 못한 채 그해 12월12일, 4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의 서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오늘 전태일은 어디서 불타고 있는가. 전태일은 이 시각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이렇다. 전태일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 그 안에 살아있다. 아들이 죽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년여의 세월을 하루같이 병약한 체구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모든 잔학한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 이소선. 이분은 후일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것이다. 또 전태일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억압 아래,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민중의 숨결 속에, 눈물 속에, 죽음 속에 살아있으며, 역경 가운데서도 생존권과 인간다운 노동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 노동자의 뜨거운 가슴속에 살아있다. … 이 결함투성이의 책자에 전태일에 관한 약간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다면, 당신이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인종·계층·신조·사상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소리칠 것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