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이 스스로 몸을 불사른 그날. 한국의 현대사는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로 달라진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그날 숯검댕이 전태일이 남긴 마지막 말이 어머니 이소선을 바꾸고, 청계천 피복노조 친구들을 바꾸어 놓았다. 그날 그 자리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됐다. 그때 친구들은 “어머니, 우리 친구들이 있으니 우리들을 믿고 태일이의 뜻을 살립시다”라고 했고, 어머니는 “그래, 너희들이 다 내 아들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전태일의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전태일이 살아생전 조금씩 넓힌 집, 쌍문동 208번지 집은 그날 이후 아들의 예언대로 언제나 노동자들로 북적댔다. 이 땅의 모든 노동운동가들이 모여들었고, 대학생들도 달려와 밤새 인간답게 사는 새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그들을 거두어 먹이기 위해 중부시장에서 헌옷가지를 사다가 팔아 생계비와 노동운동자금을 마련했다. 전태일의 동생들, 순옥·순덕·태삼의 가족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 모든 수발을 다 들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창동 어머니’로 통했다.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나는 그 무렵 이화여대의 이효재 교수가 자신의 봉급을 쪼개 어머니를 돕는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감격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찾아가 어머니를 돕자고 호소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나마 해위 윤보선 선생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청계피복노조와 어머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었다. 어머니도 그때부터 구속자가족협의회에 참여했다.
무엇보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은 커다란 위안과 힘이 되었다. 어머니처럼 당당하고 담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을 하나하나 찾아가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유가족협의회를 꾸리고 이끌어온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84년 11월 분신한 만경택시 기사 박종만씨의 주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병원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농성 해산을 설득하려던 한 야당의원을 이 한마디로 돌려보냈다. “당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이처럼 노동자가 억울하게 죽도록 만든 기업주나 당국에 항의하고자 하는 우리의 뜻에 동조해서 여기에 왔는가. 아니면 우리를 설득해서 해산시키려고 왔는가. 지금 경찰이 주검을 포위하고서 문상마저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항의도 하지 않다가 지금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당신은 권력의 앞잡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1990년 4월혁명연구소에서 처음 제정한 ‘4월혁명상’을 수상할 때, 어머니는 결코 당신 혼자 받으실 수 없다며 유가협 식구들을 전부 단상으로 끌어올려 함께 상을 받았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뿌듯한 장면인가.
특히 어머니의 즉흥연설은 문익환 목사도, 장기표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또 기억력도 뛰어나서 마석 모란공원에 가면 민주열사 묘소를 하나하나 돌면서, 누구는 죽기 전에 어떤 일을 했고, 누구는 어떤 말을 했으며, 아무개는 어떻게 살해되었으며, 아무개는 가족들이 돌보지 않아 외롭다는 것까지 소상히 꿰냈다.
하지만 해마다 아들이 떠난 11월이 되면, 어머니는 신열에 가슴이 터질 듯한 죄책감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곤 했다. 살아생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과 씨름하는 것을 불길하게 생각해 책을 솥단지에 감춰놓았던 어머니. 분신 바로 전날 집을 나가면서 11월13일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자신이 하는 일을 구경하라고 간곡히 말하는 것도 듣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끝내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절절히 후회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분신만은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절대로 죽지 말고, 제발 그 힘과 그 마음으로 힘차게 싸우라”고 역설했다. 한맺힌 호소였다.
나는 남들처럼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지도, 자주 만나 뵙지도 못했다. 다만 김지하 어머니, 정금성 여사를 통해서 70년대부터 어머니와 청계천 피복노조의 활동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의 투쟁이 곧 범국민적인 민주화 투쟁이 되도록, 그 투쟁 소식을 외국에 알리는 데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장기표를 통해서 어머니의 타고난 인품과 무용담 같은 투쟁 소식도 늘 전해들었다. 나는 <전태일평전>의 최초 독자이기도 했다.
지난해 9월3일 이소선 어머니가 81살의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일생은 일찍이 꿈 많은 처녀시절부터 저항의 나날이었고, 결혼 이후에도 어려운 살림, 사업 실패, 남편의 횡포, 아들의 가출, 무작정 상경, 화재 등을 겪었으며,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는 수많은 투쟁·연행·폭행·구속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그것도 아주 대담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어머니의 그런 힘과 지혜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어머니의 고난에 찬 삶, 그리고 고난에 찬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을 지극히 사랑하는 데서 얻은 것’이라는 장기표의 말에 나도 공감한다.
90년 11월, 3만여명이 모인 전태일 20주기 추모 노동자대회에서 어머니는 “여기 모인 노동자 여러분, 모두가 전태일이다. 아니 전태일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격려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승리했다.”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를 빼놓고 어떻게 대한민국 노동운동사를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는 어머니와 아들, 두 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전태일을 계승한다”고 아무나 너무 쉽게, 또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태일처럼 나보다 더 어리고 가냘픈 노동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말할 일이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