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조선투위’ 결성
조선일보 유신옹호글 게재
항의하는 기자 둘 해고
또 항의하는 기자 100여명
회사 밖으로 몰아내
길고긴 생활고
권력에 잘못 보이지 않을까
받아들이는 곳 별로 없어
외판원·옷장사·고추장사…
매일매일 생계 허덕
해직언론인 진술에 법정 울먹
“제도언론 사람들보다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양심을 지켰기에
어디서나 떳떳하다”
1974년 12월17일치 <조선일보> 4면에는 당시 유정회 소속 전재구 의원의 기고문이 실렸다. ‘헛점을 보이지 말자’는 제목의 그 글은 유신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는 ‘긴급조치 4호’가 해제되고, 민주회복국민선언이 발표되는 등 체제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백기범(외신부)·신홍범(문화부) 두 기자는 김용원 편집국장을 찾아가 이 글이 신문의 공정성, 특히 불편부당이라는 조선일보의 사시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항의했다.
회사 쪽은 이를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편집국장의 편집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견책 통보와 함께 시말서 제출을 요구했다. 두 기자는 당연히 거부했다. 회사 쪽은 17일 밤 기자들에게 해명 기회도 주지 않고 징계회의를 열어 해임을 결의한 뒤 이튿날 방을 붙였다.
이에 12월19일 기자 100여명은 비상총회를 열고 “두 기자의 해임을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탄압임을 지적”하며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7시간 만에 김윤환 편집 부국장은 회사 쪽을 대표해 “3개월 이내·창간 기념일인 3월5일 이전에 복직시킨다. 만약 이 공약이 실현되지 않을 땐 편집국장단이 인책·총사퇴하겠다”는 약속을 밝혔고, 기자들은 농성을 풀었다.
그러나 75년 3월5일 회사 쪽이 약속한 복직시한이 지켜지지 않자 이튿날 기자 100여명은 총회를 열어 두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이틀째부터 회사 쪽은 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장 정태기 기자 등에 대한 파면 공고를 시작으로 37명을 징계하더니 3월11일 오후 7시30분에는 방우영 사장의 지휘로 농성 기자 전원을 회사 바깥으로 몰아냈다.
3월21일, 쫓겨난 기자들은 회사 앞에서 총회를 열고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로부터 조선투위와 그 구성원들의 고난에 찬 역정이 펼쳐진다. 생계를 잃은 이들은 7월7일, 1차로 정태기 회장 등 6명이 회사를 상대로 ‘부당해임 무효확인소송’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이돈명·조준희 변호사가 소송대리인으로 나섰다.
첫 공판은 9월11일 오전 10시 서울민사지법 223호 법정에서 열렸다. 7회 공판(76년 3월15일)에서는 두 기자의 해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김용원씨와 총무국장 목사균씨가, 9회(76년 4월12일)와 10회(76년 5월10일) 공판 때는 유건호·김윤환씨가 회사 쪽 증인으로 나왔다. 당시 <조선일보투위 소식>에 실린 두 변호사의 증인신문 내용은 유신시절 한국 언론과 조선일보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유익한 자료다.
△김용원(당시 편집국장) 증인
문: 만약 어떤 기사나 글이 외부의 작용에 의해 들어갔다면 그것은 편집권의 침해인가, 아닌가?
답: 이론적으로는 침해라고 본다.
문: 이럴 땐 기자가 편집권의 침해에 대해 시정을 건의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가?
답: ….
문: 징계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본인들에게 알렸는가? 두 기자가 규정대로 징계회의에 진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를 준 바 있나?
답: 징계회의를 알린 바 없다. 반드시 진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김윤환(당시 편집부국장) 증인
문: 74년 12월19일 저녁부터 조선일보 기자들이 백기범·신홍범 두 기자의 부당해임 철회를 요구하며 편집국에서 농성을 벌였을 때 증인은 회사 쪽을 대표해 기자 대표들과 협상을 벌인 일이 있는가? 다음날 12월20일 새벽 2시쯤 협상이 타결되자 증인이 문안을 작성해 3개월 이내에 복직시킬 것을 기자들 전원 앞에서 낭독·공약한 일이 있는가?
답: 회사 대표로 나와 약속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회사의 권한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 방(방일영) 회장님과 나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내 스스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3개월 이내에 복직시키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던 것뿐이다.
문: 그러면 농성 기자들이 개인의 약속을 믿고 농성을 풀었다는 말인가?
답: 언질을 받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자신이 있었다.
문: 어떤 신문이 좋은 신문인가?
답: 사시에 맞는 신문이 좋은 신문이다.
증인 신문의 압권은 77년 5월19일 조준희 변호사와 선우휘 주필의 공방이었다. 이 항소심 3회 공판에는 <에이피>(AP) 통신, <아사히신문>, <교도통신>의 특파원들도 나와 취재할 정도로 안팎의 관심을 끌었다.
문: 그동안 한국의 언론이 외부의 압력이나 규제 없이 제작돼 왔다고 보는가?
답: 적어도 내가 편집국장을 하고 있을 때는 외부의 규제가 없었다.
문: 좋다. 그러면 71년 4월23일치 <기자협회보> 제178호에 증인(선우휘)이 기고한 글을 그대로 읽어보겠다.
“결국 권력 당국은 언론을 규제하던 끝에 언론을 병신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 데모에 또 하나의 필연성을 부여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수단이 목적화하는 데 따르는 무서운 결과를 또 한번 보았다는 느낌이다. … 권력과 언론은 영원히 대결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적대심과 아울러 외경심이 개재해 있어야 한다.”
증인은 이 글을 기억하는가. 증인은 앞서 언론에 대한 규제가 없었다고 증언했으면서도 이 글에서는 언론에 대한 규제로 언론을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답: 그런 글을 쓴 기억이 있긴 하다. 그러나 병신이라 할 때도 어느 정도가 병신인지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다. 손가락 병신도 있고, 다리 병신도 있다.
문: 증인은 73년 11월27일 조선일보 기자들이 두번째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였을 당시 원고의 한 사람인 신홍범 기자를 증인의 방으로 불러서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는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는데 조선일보 기자들은 왜 아무 움직임이 없느냐”고 묻고 “동아, 한국이 했대서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고 기자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말을 했다는데….
답: 그때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언론자유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동아와 한국이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을 뿐이다.
문: 그러면 언론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정당성보다는 신문사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기자들의 행동을 촉구했다는 말인가?
답: 그렇다.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문: 백기범·신홍범 두 기자는 증인이 받아서 가필해 넘겨준 한 유정회 소속 의원의 청탁기사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시정을 건의하다가 전격 파면되었다. 증인은 회사가 두 기자를 파면한 진의가 어디에 있었다고 보는가?
답: 두 기자의 파면은 언론자유의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두 기자의 행동은 질서가 필요한 사회에서 잘못된 것으로 봐야 한다. 문제가 된 전재구씨의 글은 내가 받아 적당히 줄여서 실으라 해서 실린 것이다. 그것은 편집국장이 아니라 내 소관사항이다. 이야기를 했어도 주필인 나에게 했어야 했다. 기자는 기사만 쓰면 되는 것이다. 기자가 신문 제작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월권행위이며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문: 신문이 아무리 잘못 제작되어도, 마땅히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져도 기자는 가만히 기사만 쓰고 있어야 하는가?
답: 그렇다. 기자들의 생각은 얕다. 신문에 대해 보다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은 선배들이며, 신문을 올바로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도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사장이다. 그들은 선배들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기자들의 행동이 무엇을 하자는 투쟁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문: 조선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 실천을 위해 기자들의 움직임을 서로 알리고 기자들 스스로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짐하기 위해 홍보매체로 기협 분회보를 발행했는데, 증인은 그 발간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답: 신문 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문: 신문을 올바로 만들자는 기자들과는 반대로 회사가 압력에 굴복하여 기자들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렸을 때도 가만히만 있어야 하는가?
답: 그런 지시를 내렸을 리도 없고, 그런 가정도 할 수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신문을 잘 만들기 위해 가장 걱정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사장이다. 대외 언론경쟁을 위해 사장 이하 사환들까지 단결해야 하는데, 회사 간부들을 대상으로 해서 싸움을 한다는 것은 100퍼센트 잘못된 것이다.
문: 사장 이하 간부들이 신문의 책임을 포기했을 때도 가만히만 있어야 하는가?
답: 포기할 리가 없다.
문: 증인이 기자협회보에 쓴 글대로, 언론에 대한 규제로 언론이 병신이 되어 빈사 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있어야 하는가?
답: 물론이다.
조선투위 기자들은 ‘부당해고 무효확인’ 소송에서 1심(76년 12월16일)과 2심(77년 9월22일) 모두 패소했다. 이들 해직기자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했던가. 87년 5월6일 ‘보도지침 사건’ 재판에서 박원순 변호사의 질문에 대한 신홍범 피고인의 진술을 들어보자.
“피고인과 다른 해직언론인들은 그동안 어떻게 생활해 왔는가?”
“우리 시대에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동아·조선의 해직언론인들은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적지 않은 고생을 한 것이 사실이다. 생계를 위해 다른 직장을 구하고자 해도 혹시 권력에 잘못 보이지나 않을까 두려워 해직 언론인들을 받아들이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동료들이 매일매일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번역 이외에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거리란 별로 없었다.
조선투위의 동료 한 분은 신문사 재직 때부터 어느 야간대학의 강사를 했는데, 해직당한 뒤 밤에는 강사를 하고, 아침에는 용산 농산물시장에 나가서 고추장사를 하기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한 사람, 양복점에서 외판원을 한 사람, 한약방에서 약을 썬 사람도 있었다.(방청석에서 울먹거림)
본인은 조선투위의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현재 제도언론에 있는 사람들보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기에, 자기의 양심을 지켰기에 어디에서나 떳떳하고 당당하고 자유롭다. 본인은 해직언론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존경하고 있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