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3일 서울 공덕동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실에 모인 해직 언론인들. 1심 선고공판에서 풀려난 보도지침 사건 3인방-김태홍·신홍범·김주언-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왼쪽부터 조선투위 정태기·신홍범 기자
1987년 6월3일 서울 공덕동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실에 모인 해직 언론인들. 1심 선고공판에서 풀려난 보도지침 사건 3인방-김태홍·신홍범·김주언-을 환영하는 자리였다. 왼쪽부터 조선투위 정태기·신홍범 기자

내가 리영희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10년 5월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이자 평전이라 할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출판기념회 날이었다. 그 책의 서평을 맡아 기념회장으로 가는 길에 백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를 방문했다. 복수로 배가 불러 있었는데도 그의 얼굴은 온화했으며, “병원에 들어올 때는 마음이 약했으나, 내 이제 반드시 이 병을 이겨내고 말겠노라”며 투병 의지도 강해서 어쩌면 저분이라면 이겨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돌아섰다. 그해 12월2일 81회 생일을 넘긴 사흘 뒤 새벽에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의 말대로 인명은 재천이요,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길을 밝히거나, 고난의 십자가를 스스로 졌던 선배들이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안타깝고 고통스럽다.

선생은 저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렇고, 앞서 <창작과 비평>에 실린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통해 모든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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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을 낼 때마다 비장했다. 짧은 글이나 긴 글이나 활자화시켜 놓고는 그때마다 옷을 입고 밤에 잠을 잤다. 왜냐하면 체제의 공식여론이나 정책에 합치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혹시 자신을 잡으러 방 안에 들이닥친 사람들한테 벌거벗은 상태에서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 긴 세월, 글쓰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이고 고역이었을까. 시대의 진실을 밝히고 드러내기 위해 그는 자신이 먼저 몸을 태우는 촛불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생애 동안 언론사에서 두번 쫓겨났고, 교수직에서 두번 해직되고, 아홉번 연행에 다섯번 감옥에 가고, 세번이나 형사재판을 받았다. 특히 71년 한양대 전임교수가 된 뒤 그의 글쓰기는 본격화됐고 그에 따른 수난도 심해졌다. 77년 11월23일 그는 이때도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기소가 확정된 12월27일 그는 면회 온 아내로부터 그날 새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전해들어야 했다. 그는 장례 시간에 맞춰 집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제상을 차렸다. 아침 ‘가다밥’과 오경찬(감옥에서 나오는 반찬), 그리고 다 식은 멀건 콩나물국 그릇을 서대문구치소 3사 상4호 감방의 마룻바닥에 휴지를 찢어 마련한 제상 위에 모셨다. 그날 저녁 김지하가 몰래 보내온 알사탕 한 봉지를 그 옆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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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영희를 처음 만난 것은 64년 겨울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그때 나는 이른바 6·3 사태 배후조종자로 몰려 그해 여름부터 독방에 있었고, 리영희는 그해 겨울 몇방 건너 들어왔다. 그때 구치소에는 ‘가뭄이 너무 심해 북한이 준다는 식량지원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기사를 쓴 <경향신문>의 추영현 기자도 있었다. 출감 이후 나는 조선일보사로 찾아가 그를 만났고 때로는 추영현과 함께 만났다. 더러는 사직동 대머리집에서 술도 마셨다.

그 얼마 뒤에는 신홍범·백기범·박범진 등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들은 리영희를 무척 어려워했다. 외신부장 리영희는 텔레타이프로 들어오는 외신을 우선순위를 매겨서 아홉개씩 뽑아오라고 훈련시켰다. 그 시절 선생은 얼굴에 늘 시니시즘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말투도 항상 시니컬했다. 아마도 세상이 요구하는 시각과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시각의 차이가 그로 하여금 그런 냉소적인 표정을 짓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 안인학이 편집 책임을 맡고 있던 <정경연구>, 순수문예지에서 이제 막 사회과학 논문을 싣기 시작한 <창작과 비평>에 그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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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건호 민언협 창립 의장
송건호 민언협 창립 의장

그가 69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둔 뒤 책 외판원·양계농장·택시기사 등을 놓고 ‘인텔리의 길’을 고민할 때도 나는 그 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총 사격술과 운전실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그 기술로 택시운전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박윤배의 주선으로 김지하 변호를 맡아준 강신옥 변호사에게 답례로 저녁을 내고 2차로 강 변호사 집으로 몰려갔는데 리영희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서교동의 잔디마당이 있는 2층집에 도착하자 그는 “이런 부르주아하고는 안 논다”며 통행금지 시간에 돌아가겠다고 심통을 부렸다. 그 정도로 그는 괴팍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받아줬다.

80년대 연세대에 다니던 외동딸 미정이 학내 시위 관련으로 구속됐다. 시위 현장에서 유인물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준 것이 드러난 혐의의 전부였다. 김정례 보건사회부 장관을 통해 선생 몰래 그 부인의 이름으로 진정서를 쓰고 도장을 새겨서 찍어 보냈다. 그 덕분에 미정은 재판 전에 석방되었다. 당시로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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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해했다. 특히 56년 11월13일 결혼한 아내 윤영자에게 그랬다. “당신 고집 때문에 식구들이 끝내 햇빛을 못 보고 살게 될 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러던 아내도 그가 80년 3년 만에 풀려났을 때는 인권투사가 돼 있었다. 형사들이 따라붙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한번은 20일간의 구류도 살았다. 아내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끝매듭은 경찰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부러져 내내 구부러져 있다.

<한겨레> 논설고문으로서 방북취재 모의 혐의로 구속됐던 89년, 그는 재판정에서 아내를 향해 “정말, 당신에게 미안하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그 말의 진정성이 방청객은 물론 그 얘기를 보고 들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해마다 엽서에 쓴 연하장을 보냈다. 2010년에도 불편한 몸으로 쓴 글씨가 역력한 연하장을 받았다. 마지막 뜻으로 남았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