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사건 무죄 나와도…
정치공안 사건 관계했던
그 많은 판사나 검사
누구도 반성하거나
참회한 사람이 없다
한국 현대사의 인권변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1976년 12월23일 김지하 재판의 결심공판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두고 변호사 6명이 4시간에 걸쳐 변론을 했다. 박세경·이돈명·이세중·조준희·황인철·홍성우 변호사 순이었다. 결론 부분을 마지막으로 변론하면서 홍 변호사는 당시로서는 미발표 작품이었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낭독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변론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우리는 위에 읽은 김지하의 짤막한 시 한편에서 그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 속에 넘쳐 흐르는 김지하의 진실, 즉 민주주의에 대한, 자유에 대한 그의 타는 목마름과 불타는 정열이 이토록 뿌듯한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입니다. 부디 이 법정의 판결이 김지하 피고인의 이 진실을 극명하게 빛 속에 드러내는 훌륭한 판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0년,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재판장은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법원은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사명이 있음에도, 36년 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해 재판 자체가 회복할 수 없는 인권침해의 수단이 되었다. 사법부는 당시의 재판을 30년이 넘도록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해 당사자들에게 사과한다. 노년기에 이르거나 이미 고인이 된 분들께 재판부의 사과가 위로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계기가 돼 이들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재심 재판부의 사과에는 진솔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공안 사건에 관계했던 그 많은 판사나 검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참회한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1970~80년대 주요 시국사건의 재심에서 연이어 무죄판결이 나오고 있다. 우여와 곡절은 있지만, 역사는 마침내 정의로운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들 사건에서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 데 가장 확실한 근거는 당시의 재판기록이었다. 인권변론의 기록이 무죄판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권변호사들을 ‘유죄 변호사’라고 일컬었던 적이 있다. 박현채 교수가 이돈명 변호사를 보고 “인권변호사가 아니라 유죄 변호사”라고 익살스러운 투정을 했던 것이 효시였고, 이후 널리 통칭됐다. 인권변호사가 맡은 사건 대부분이 유죄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니, 그런 말이 순전한 억지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때 그 유죄 변론이 지금 무죄의 결정적 단초가 되고 있으니, 이제는 유죄 변호사가 아니라 무죄 변호사라 불러야 마땅하다.
■ 법정 밖에서의 인권변론
그 시절 인권변론을 부탁할 때, 무죄판결이나 석방을 기대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변호사가 있으면 괜히 마음이 든든했고, 감옥의 피고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으로 족했다. 따라서 인권변호사들의 임무는 접견과 통신, 감옥 안에서의 인권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생각나는 사례로 이런 것들이 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이광일은 당시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가 홍 변호사에게 찾아와 호소하기를, 그가 24시간 내내 수갑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육군교도소의 규칙을 어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홍 변호사가 육군교도소로 달려갔을 때도 그는 수갑을 차고 나왔다. 홍 변호사는 ‘명백한 불법’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상급기관에 공식적으로 항의할 뜻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이광일의 손에서 수갑을 풀어낼 수 있었다. 이광일은 그 뒤 목사가 됐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이화여대의 학생회장을 하던 한 학생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홍 변호사가 그 학생의 변론을 맡게 되었는데, 어느날 서울공대생이 찾아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냐고 물었다. 그 여학생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 얼마 뒤 그 남학생 역시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홍 변호사는 양쪽을 번갈아 접견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의 메신저’ 노릇을 했다.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문익환 목사가 구속되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홍 변호사가 구치소로 문 목사 면회를 갔더니, “내가 노래 소절 하나를 불러줄 테니, 적었다가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을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이/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이 노랫말은 그대로 뒷날 개신교 찬송가 261장(최근 찬송가로는 582장)의 3절도 더해졌다.
■ 법정문화를 한 차원 높이다
인권변론 활동은 피고인의 인권보호와 법률(법정)문화의 발전에 결과적으로 크게 기여했다. 겨울 나무의 나이테가 더 단단하듯이, 인권의 동토에서도 법정의 정의는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관행으로는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은 법원 서기에 의해 ‘예’ ‘아니오’라고만 기록되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진술한 내용도 한두 줄로 기록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 지난 공판의 진술 기록을 매번 고지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것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76년의 김지하 재판 때 변호인들은 “사건의 중요성이나 성격에 비추어서 재판의 전 과정을 그대로 기록해 달라. 법원 형편상 그것이 어렵다면 변호인 쪽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또 지난 공판의 진술 내용을 기록에 따라 고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재판부(재판장 심훈종)에 의해 그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속기사가 재판의 전 과정을 기록했다. 물론 그 비용은 변호인 쪽에서 부담했다. 덕분에 황인철 변호사는 금전출납을 기록하는 공책까지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김지하의 재판 과정은 검찰의 직접심문에서 변론과 최후진술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이 빠짐없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 첫 사례였다.
80년대 들어 피고인의 모두진술권을 확보한 것도 중요한 전진이었다. 이 모두진술권에 의해 김근태는 자신이 고문당한 사실을 재판에 앞서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무미건조했던 법정문화도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는 살아있는 법정으로 바뀌어갔다. 77년 4월 예수회 수사 김명식의 ‘10장의 역사연구 사건’, 77년 7월 양성우의 ‘노예수첩 사건’ 등에서는 문학에서의 묘사가 사실왜곡이 될 수 있느냐는 논쟁이 법정에서 벌어졌다.
예컨대 양성우의 ‘노예수첩’ 제14장은 이렇다. ‘호남선 열차는 서둘러서 온다/ 아침에 떠났다가 저녁이면 온다/ 이빨 갈며 주먹을 휘둘러대며/ 맞아 죽은 머슴들이/ 서울로 온다/ 말하라 말하라/ 총칼 앞에서/ 어두워도 호남선 열차는 떠나고/ 떠났다가 한숨만 가득 싣고/ 온다/ 맞아 죽은 머슴들의 단단한/ 설움/ 녹지 않는 설움만/ 가득 싣고 온다’
이에 대해 검찰은 공소장에서 “도시의 자본가나 기업가에 의해 수탈당하여 온 농민들이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마저 보장받지 못하여, 견디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올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호소해 볼 자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는 양 사실을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어 명백한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적었다.
문학작품은 본질적으로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인 쪽은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적힌 해당 내용을 제시하는 한편, 시인 김규동을 증인으로 신청해 실제 있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묘사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증언을 들었다.
사실왜곡과 관련한 법정공방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서도 벌어졌다. 당시 송기숙 교수 등에 대한 공소내용의 핵심은 “마치 국민교육헌장이 제정· 선포 과정에서 행정부 독단으로 추진되고, 내용에 비민주적 요소가 있는 양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함으로써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그의 최후진술에서 “무릇 진술이란 사실의 진술과 의견의 진술, 두 가지로 대별된다. 국민교육헌장에 비민주적 요소가 있고 제정 과정에 정부의 독단이 작용했다는 것은 나의 의견이다. 사실의 진술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런 의견이 나올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었던 이상 ‘사실왜곡’이란 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 허무하게 끝난 오원춘 사건
인권변론 활동이 큰 상처와 좌절에 빠진 적이 있었다. 79년의 오원춘 사건 때였다.
오원춘은 경북 영양군 청기에 사는 농민으로 가톨릭농민회 회원이었다. 그는 군에서 보급한 씨감자가 싹이 트지 않자, 투쟁 끝에 피해보상을 받아내, 일약 그 지역의 작은 영웅이 되었다. 투쟁 사례를 강연하고 다니던 그는 79년 5월5일부터 보름간 정체불명의 두 사람에게 납치당해 포항을 거쳐 울릉도까지 끌려다녔다.
돌아와서도 주눅들어 있던 그는 얼마 뒤 그 사실을 신부에게 고백했고, 가톨릭농민회 쪽에서는 사실 여부를 여러 차례 조사했다. 오원춘은 그해 7월5일 ‘영양천주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아래서’ 사실을 확인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천주교회는 오원춘 사건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나 유신권력은 거꾸로 오원춘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했다. 대구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이건호 변호사에게 법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9월4일에 열린 첫 공판에서부터 그는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거의 그대로 인정했다. 공아무개 여인과의 불륜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섬에서 몰래 썼던 ‘육지에 가면 진실을 말하리’라는 쪽지와, 양심선언문도 모두 다 “잘못된 생각에서 그렇게 썼다”고 검사의 눈치를 보면서 답했다.
2차 공판을 준비하던 중 변호인 쪽은 그의 수첩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오원춘이 영양읍내에서 그 여인과 불륜관계를 가졌다던 바로 그날,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의 정재돈 총무가 감자피해대책 회의차 청기에 가서 그를 만났다는 기록이었다.
그해 9월25일 제2회 공판이 열렸다. 이돈명 변호사가 오원춘을 상대로 다른 얘기로 뜸을 들이다가 정재돈의 수첩을 갑자기 보여주며 ‘그날 정재돈과 같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오원춘은 처음 몹시 당황하더니 이내 날짜는 다를지 모르지만, 공소장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우겨댔다.
그의 재판을 보러 달려온 천주교 신자와 성직자들이 “알퐁소(오원춘의 세례명) 힘내라”며 기도와 성가와 손팻말로 격려했지만, 그는 끝내 진실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안동대교구 두봉 주교를 비롯해 방청객들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그렇게 2회 공판을 허탈하게 끝내고 변호인단은 서울로 오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영동과 황간쯤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평소에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던 황인철 변호사가 맥주 몇잔을 마시더니 중앙 통로에 털버덕 주저앉아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도, 그리고 같이 같던 이돈명·조준희·홍성우 변호사도 울었다. 그때 황 변호사가 울면서 독백처럼 말했다.
“우리는 그래도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사람들, 불의에 짓밟힌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노라고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는데, 오원춘이 왜 우리를 이렇게 처참하게 만들고 있는가. 참으로 슬프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