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 건너 이돈명 변호사
한사람 건너 이돈명 변호사

2008년 7월4일 ‘바가지 산우회’의 총무 전병용이 “형산대형 홍성우 변호사가 칠순을 맞게 되었으니 다 같이 한번 모여 축하하자”는 내용의 회람을 돌렸다. ‘형산’(兄山)이란 아호는 산우회원들 중 연장자라 해서 지었는데, 전병용은 우리 모두가 맏형처럼 존경하고 받들어 모신다는 뜻으로 ‘형산대형’이라 썼다.

그의 삶 자체가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해, 그것도 불의에 짓밟히면서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으로 일관된 삶이었으니, 나도 이런저런 뜻에서 그를 일러 대공이라 부르고 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40년 가까이 그와 한 시대를 살면서 그의 향훈을 맡으며 살아왔으니,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은혜요 지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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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나는 덕수궁 앞 광학빌딩에 있던 황인철 변호사 사무실에서 홍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두 변호사에게 막 결성하려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두 변호사는 나의 요청을 흔쾌히 승낙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홍 변호사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사무국장의 직책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법정 밖의 아픔에까지 동참하면서 수난도 시작되었다. 당시 상임대표위원은 윤형중 신부였는데, 그분은 연만하신데다 병중이었다. 따라서 민주회복국민회의는 홍 사무국장, 함세웅 대변인 체제로 이끌어 갔고, 나는 그 뒷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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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도 홍 변호사는 남산에 끌려가 견디기 어려운 곤욕을 치렀다. 몇몇 운영위원이 중앙정보부의 압력에 못 이겨 사퇴서를 쓰기도 했다. 홍 변호사의 집에는 협박전화가 오고, 때로는 섬뜩한 문구에 붉은 글씨로 쓰인 협박전단이 집안에 던져져 있기도 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설사 엄청난 고난과 위험을 가져올 것이 뻔할지라도, 그것이 진정 가야 할 길, 옳은 길이라면 그것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이듬해 그를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의 변호인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칼이 서 있던 그 법정에서 검찰과의 치열한 공방이나 부담스러운 변론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나는 늘 뒤에서만 거드는 척했을 뿐, 돌을 맞는 것은 언제나 홍 변호사였다. 80년에는 변호사 업무조차 강제로 휴업해야 했다. 그래서 늘 미안하다. 특히 그 가족에게는 큰 죄를 지은 느낌을 가질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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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은 해방 이후 첫 ‘반미’ 구호를 내건 사건인 까닭에 변호인들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당시 이돈명 변호사가 사목회장으로 있던 세종로성당의 사제관 방에서 내가 변론 요지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가장 민감한 ‘방화의 동기와 목적’ 부분은 역시나 홍 변호사가 맡았다. 결심 때 홍 변호사가 한 변론의 마지막 부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 사건이 한국에서 한국 국민의 민족적 자존심과 존엄을 확인하는 계기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으로 불의의 희생을 당한 고 장덕술군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사건에 임하여 최종적으로 느낀 소회는 과연 그 누가 민족의 이름으로써 감히 이들에 대하여 돈을 던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70~80년대를 통틀어 나는 그 전반기에는 홍 변호사 사무실에, 그 후반기에는 이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 아닌 출근을 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주요 문건을 작성하고, 타자나 복사를 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문건이 두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한번은 해위 윤보선 선생이 홍 변호사를 사무실로 찾아왔다. 해위는 늘 홍 변호사의 인권변론 활동을 고마워해 직접 휘호를 써보낸 적도 있었다. 나도 합석해서 담소를 나눴는데 해위가 나가자마자 정보과 형사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해위가 왜 왔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들이 떠날 때까지 내내 책상 밑에 쪼그린 채 숨어 있어야 했다.

홍 변호사는 칠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천진한 구석이 많다. 예전에는 가수 배호와 이용의 노래를 좋아하더니 한때는 태진아의 ‘옥경이’를 진지하게, 있는 힘을 다해 불렀다. 절창이란 아마도 그처럼 부르는 자세를 두고 말함이 아닐까. 김용택이나 정호승의 좋은 시를 술자리에서 들려주거나 이메일을 통해서 나누어주는 것을 보면 그는 아직도 영락없는 문학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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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누가 뭐래도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이가 많다. 그를 어떤 모임에서는 농담 반 진정 반으로 지존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가지 산우회에서 그는 종신회장이다. 몇년 전 식도암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지금은 잃었던 건강도 많이 회복했다. 할 말은 끝이 없지만, 생과 사에 대한 인디언의 송사를 빌려 이 글을 맺는다.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