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법원 인권유린 동참
검찰은 독재정권의 변견
법원은 자포자기 무력증
모든 사건에 예외없이
기계적으로 유죄 판결
인권변호사 탄압 혹심
일반사건 못맡게 방해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간통 고소하게 하거나
기고문 문제삼아 구속
4인방의 활약
이돈명은 ‘맏형’ 노릇
황인철 ‘총무’, 홍성우 ‘선봉’
법정엔 주로 조준희가…
호흡이 잘 맞았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권위주의적인 독재와 탄압이 강화될수록 그에 대한 민중적 저항도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당시의 민주화운동은 구속과 재판, 수배와 감옥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정치적 사건들은 대체로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 악법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종교인·지식인들의 집회, 시위, 성명발표 등의 방법에 의한 민주화운동이고, 둘째는 개발독재를 통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되고 있던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의 생존권 투쟁, 셋째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낸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간첩사건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사건들은 시대에 따라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죄목으로 구속 기소되었지만 구속 자체가 정치보복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인권유린이 뒤따랐다.
그러나 유신체제하에서 군부독재정권의 충실한 ‘변견’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검찰과 그런 억압체제하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식의 자포자기와 무력증에 빠져 있던 법원은 모든 사건에 예외없이 기계적으로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인권유린에 동참했다. 거기다 70년대 긴급조치 사건의 재판은 보도 자체가 긴급조치 위반이어서 기록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처럼 호소할 곳조차 없는 사람들의 변론을 도맡아 해준 이들을 일컬어 ‘인권변호사’라고 부른다. 이들은 피고인의 소신과 신념은 존중·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법정에서 그의 편이 돼주려고 애썼다. 이들 초법적 재판 환경에 절망하면서도 피고인들이 한 행위는 그 대부분이 애국적 충정과 양심에서 비롯된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고 연민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유신체제하에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재판 절차지만 그들을 위해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인권변호사들은 접견을 통해 감옥 안과 밖을 연결했으며 피고인들이 결코 실의에 빠지지 않게 하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대를 누구보다 큰 눈으로 지켜본 시대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마침 내일(1월11일)은 이돈명 변호사가 별세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 인권변호사의 고행길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변호사는 모두 다 인권변호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존경심을 가지고 불러줄 수 있는 인권변호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선 인권변론을 맡고 나선 변호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혹심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 도중 변론을 문제삼아 강신옥 변호사를, 그 이듬해 3월에는 오래전 잡지 기고문을 문제삼아 한승헌 변호사를 구속했다. 한 변호사의 사례는 재구속된 김지하의 변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권변호사들이 일반 민형사 사건을 맡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인권변호사 활동을 위해서는 이 모든 불이익을 감당할 순정한 마음과 정의감이 있어야 했다. 홍성우 변호사는 “학생들의 순연한 희생, 노동자들의 어려운 처지, 그것도 인간 이하의 대우를 자행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져서 가만있을 수 없었고”,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사건, 다른 사람들이 하기 꺼리고 해봐야 생기는 것이 없는 사건”등을 찾아 “누구도 감히 대면할 엄두를 못 내는 피고인들에게 다가갔고, 내 용기가 부족하면 뜻을 같이하는 변호사들의 의지를 모아 같이 갔다”고 말한다. 또 인권변호사는 도덕적으로도 지탄받을 만한 약점을 갖고 있지 않아야 했다. 사생활의 약점이 있거나 변론 의뢰인들과 관계가 원만치 않으면 불이익을 누구보다 빨리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75년 1월 인권변론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병린 변호사의 수난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막 발족된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와해시키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지만 ‘인권변호사 이병린’의 명예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중앙정보부는 그를 구속시키기 이틀 전에 찾아와 간통죄로 검찰에 고소가 접수되었음을 알리고 미리 준비해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사임서’에 도장만 찍으면 입건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물론 이 변호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제 보복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중정은 이 변호사가 잘 다니는 일식집 여성 종업원의 별거중인 남편을 종용해 간통죄로 고소하게 했다. 다행히 유현석 변호사의 기지와 이돈명 변호사의 신속한 대응으로 이병린 변호사는 23일 만에 풀려나왔다. 간통죄는 이혼 신청과 함께 고소해야만 성립했기에, 이혼 소송을 취하하면 간통 고소도 자동으로 취하되는 것이었다. 이런 법리에 착안한 이돈명 변호사가 그 여성의 아버지를 설득해 사위를 호통쳐서 취하서를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병린 변호사는 이 사건으로 더 이상의 공식적인 민주화운동 내지 인권변론 활동을 접는다. 한말의 국적 이완용의 집안이라는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그였다. 그는 간통사건이 자신의 허명을 불식해 주었다며 “법적 책임은 여하간에 나의 수치임은 분명하다”고 밝히고 그해 12월 서울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북 김천·상주·안동을 떠돌다 86년 8월21일 76살을 일기로 굴곡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이는 변협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한변협회관 뜰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 흉상의 뒷면에는 그가 수안보 서울장여관에서 홍성우 변호사에게 써 보낸 편지에 적혀 있던 ‘우음’(偶吟)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가 후배 인권변호사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연거연래우일춘(해가 지고 해가 오면 봄이야 또 오건만)/ 백발휘처우정신(백발 흩날리는 곳에 우정 더욱 새롭다)/ 수작병로이별고(누가 병든 늙은이에게 이별의 아픔까지 안겨주는가)/ 매하분수흥고인(매화나무 아래서 옛친구와 헤어지며 손을 나누네)’
같은 편지의 하단에는 그가 쓴 시조 ‘양심수’도 쓰여 있는데, 바로 인권변호사의 마음이었다.
‘벽돌도 차거니와 인심도 어나보다/ 격장천리 소식이야 알듯말듯 하다마는/ 밤마다 잠못이루는 내 가슴이 아파라’
■ 인권변호사 4인방의 활약
홍성우 변호사는 그의 증언 <인권변론 한 시대>(2011년)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1974년초 여름 나의 인생행로를 한달음에 바꿔버린 사건이 나를 찾아왔다. 바로 그 유명한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내 친구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변호인석에 앉게 되었을 때, 나는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주 살벌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군법회의 법정이었지만 수갑을 차고 묶여 있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나라의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애국충정을 불순한 용공적 책동으로 몰아가려는 검찰의 무지막지한 공소내용을 보면서 나는 그 학생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야말로 이 암울한 시대를 사는 변호사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홍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는 대학 동기다. 그 대학 동기 변호사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했다. 어느날 황 변호사 사무실에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인 서울대생 이철의 부모가 찾아왔다. 그때 황 변호사 사무실에는 이아무개라는 사법연수원생이 실무수습차 와 있었다. 그는 이철과 고교 동기였다. 그는 황 변호사에게 “이철이가 내 친구인데 변론을 맡아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황 변호사는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고 대학 동기 모임에 와서 함께할 것을 호소했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 홍 변호사와 임광규 변호사였다.
‘법정의 애국가’는 월간 <신동아>(75년 1월호)에 홍 변호사가 쓴 에세이 제목이다. 나 역시 이 글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1974년 9월28일 육군본부 내 비상고등군법회의의 법정에서 소위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30여명의 학생들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군법회의 심판부가 입장하여 재판장이 개정선언을 하자 기립해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비장한 음성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며 애국가를 봉창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애국가 봉창이 시작되자 돌연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옆에서 계호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아우성을 치며 손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기 시작한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학생들과 그 입을 틀어막는 교도관들의 손과 닥치라는 아우성….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고 학생들이 애국가를 계속하자 재판장은 학생들 전원을 퇴정시킬 것을 명령했다. 피고인인 학생들 대신 변호인인 필자 한 사람만 변호인석에 덩그러니 앉혀놓은 채, 모두 합산한다면 백 수십년은 됨직한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75년 초부터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 때 기자들을 응원하는 격려광고 모집에 열심이었다. 변호사들의 돈을 모아 ‘법조인의 격려’라는 광고를, 광고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돌출광고로 연속적으로 내고 있었다. 그는 유현석 변호사와 연명으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8조)- 뜻있는 분의 많은 참여를 바라면서’라는 광고를 냈고, 한·홍·황 변호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제1항)’라는 광고를 냈다.
이 변호사는 그만큼 민주화에 열정적이었다. 광고 문구는 헌법 조문, 인권선언, 인권에 대한 격언으로 채웠다. 민청학련 사건 때는 변론은 맡지 않았지만 사건의 진행과정과 진상을 진지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75년 3월 김지하가 재투옥되자 자청해서 인권변론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이 변호사는 홍·황 변호사보다 17~18년 연상으로 인권변론의 맏형 노릇을 해냈다. 김지하 재판 때는 사건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던 “인혁당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부분을 맡아서 변론했다. 그의 삶은 그 이후 죽는 날까지 인권변론으로 일관했다.
조준희 변호사는 김지하 사건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명동성당 학생시위 기도 사건에서부터 인권변론을 맡기 시작했다. 홍·황 변호사의 요청에 기꺼이 호응한 것이다. 법정에는 주로 조 변호사가 나갔는데 학생들의 재판 거부로 중간에서 무척 애를 먹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김지하 사건으로 연결되면서 ‘인권변론 4인방’이 탄생했다.
네 사람은 호흡이 잘 맞았다. 황 변호사가 인권변론의 총무 격이었다면 홍 변호사는 선봉을 맡았고, 이 변호사는 연장자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스스로 떠맡았다. 조 변호사는 성품이 온화하고 원만한데다 합리적이라 언제나 중심에서 정론을 폈다.
나는 권력지향적인 패거리 냄새를 풍기는 ‘4인방’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 네 사람이 군부독재시절 이 나라 인권변론의 큰 흐름을 이끌고 지켜나왔다는 점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