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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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63년 4월 초 동교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국회에서 귀가한 남편은 2개의 문패를 내놓았다. ‘김대중’, ‘이희호’.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대문에 당신과 내 문패를 나란히 답시다.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이뤄나가는 거 아닙니까?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 자신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