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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직후인 1997년 12월22일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부 차관(왼쪽)과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고 있다. 립튼 차관은 구제금융 지원을 위해 한국의 새 대통령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러 한국에 왔다. 유종근 전북지사는 “천하의 김대중이 애송이 같은 미국 정부 차관에게 시험을 보는 꼴이 됐다”고 말했다. 국회 사진기자단
대선 직후인 1997년 12월22일 서울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부 차관(왼쪽)과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고 있다. 립튼 차관은 구제금융 지원을 위해 한국의 새 대통령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러 한국에 왔다. 유종근 전북지사는 “천하의 김대중이 애송이 같은 미국 정부 차관에게 시험을 보는 꼴이 됐다”고 말했다. 국회 사진기자단

 

1998년 9월28일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 특별기자회견에선 뜻밖에 웃음이 번진 장면이 있었다. 물가는 뛰고 고금리로 은행 대출이 막히면서 기업과 국민 모두 극심한 고통을 받을 때였다. 초긴축·고금리의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 수정 용의를 묻는 기자 질문에 김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지나친 긴축과 고금리 정책은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가 혼나는 바람에 잘못하면 떨어질 뻔했다”고 말을 꺼냈다. 회견장엔 폭소가 터졌다.

실제로 그랬다. 김 대통령은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국제통화기금과 재협상’을 주장했고 큰 논란이 일었다. ‘당선되면 아이엠에프(IMF) 프로그램을 그대로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다른 대선 후보와 마찬가지로 써야 했다. 그러나 IMF의 1차 구제금융(약 56억 달러)이 들어온 뒤에도 외환 사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과 국제통화기금은 추가 자금 지원을 머뭇거렸다. 이런 와중에 12월18일 대선에서 김대중은 차기 대통령에 선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