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폭탄이 정말 그렇게 많이 오나요?”
대답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6일 오전, <한겨레>와 만난 더불어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꺼져 있던 스마트폰을 켜 보였다. 벼르고 있었다는 듯 문자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5분이나 지났을까. 의원의 스마트폰엔 읽지 않은 문자메시지 100여개가 쌓였다. “이재명 버리면 절대 민주당 안 찍는다.” 그가 보여준 스마트폰 화면에 이런 문자가 떴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패배 이후, 친문재인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재명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메시지였다. “많을 때는 10초에 1개씩 문자가 들어와요.” 그는 이런 ‘문자폭탄’에는 익숙해졌다는 듯 말했다. 4월엔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을 반드시 처리하라’는 내용이, 지난달엔 ‘이재명을 인천 계양을에 공천해야 한다’는 내용과 ‘박지현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내부 총질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단골 메시지였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의 중요한 의사결정 중 상당수가 문자의 ‘지침’대로 이뤄진 모양새다.
170석 거대 야당 민주당을 누가 이끄는가. 일사불란하게 당을 좌지우지하던 ‘제왕적 총재’가 사라진 시대, 민주당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으로 ‘팬덤 정치’가 주목받고 있다. ‘당원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걸고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뭉친 열성 지지자들이 2012년 문재인 대선 후보 선출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무기 삼아 당의 여론을 움직이며 직접적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대선 주자였던 이재명 의원 지지층으로 이뤄진, 이른바 ‘개딸’(개혁의 딸)로 대표되는 민주당의 신흥 팬덤은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와 지방선거에서 이재명·송영길 후보 공천을 관철하는 데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며, 다가올 8월 전당대회에서 권리당원으로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당 안에선 이들의 영향력을 두고 ‘티끌이 태산을 움직인다’는 우려와 ‘지지층의 의사 표시에 불과하다’는 반론이 여전히 엇갈린다. 하지만 이해 득실에 따라 정치인들이 팬덤에 편승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당이 운신할 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지적에는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강경파가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팬덤에 기대고, 팬덤은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이들에 대한 지지 강도를 높이면서 당내 의사결정 과정 자체가 형해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의 온라인 권리당원 모집 작업을 총괄했던 한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우리 지지층 중 4% 정도만이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열성 지지층’으로 보인다”며 “당내 매파가 득세하는 데는 항상 이들의 목소리가 뒷받침된다.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왜그 더 도그’ 현상이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대선과 지선의 잇단 패배 이후, 당 안에선 민주당이 정치적 갈림길에 섰을 때마다 팬덤을 등에 업은 강경파가 득세하기 쉬운 구조로 당의 체질이 변화하면서 민심과 동떨어진 정당의 길을 걷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대선 패배 뒤 민주당이 추진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속도전’은 당심(지지층 여론)과 민심(일반 여론)의 온도차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4월13일 전국 유권자 1017명에게 벌인 여론조사에서 ‘검수완박’에 대한 찬반 의견은 52 대 38로 반대가 우세했지만, 민주당은 당론으로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을 밀어붙였다. 한 재선 의원은 “지금 나타나는 팬덤 정치의 양상은 민주당과 대중의 연결고리 자체를 끊어 우리끼리만 폐쇄적으로 돌아가게만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팬덤 정치는 잘못된 결정의 책임을 물을 대상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도 있다. 강경론이 여론의 역풍을 맞더라도 당원·지지층의 요구를 받들었다는 명분이 방패막이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는 내부 자성과 같은 당내 자정 능력을 약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 3선 의원은 “문재인·이재명 팬덤과 민주당 지지층이 괴리되는 현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정당정치의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그간 팬덤 정치의 폐해가 수면 위로 드러날 때마다 이를 공론화하기보다 방관하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팬덤의 적극 지지를 필요로 하는 쪽에서 팬덤 정치의 부작용에 눈을 감아온 결과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른바 ‘문파’라고 하는 열성 지지층의 문자폭탄을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옹호했고, 이재명 의원은 열성 지지층인 ‘개딸’들의 문자폭탄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한 적이 없다. 한 3선 의원은 “사실상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문자폭탄에 전적으로 휘둘리는 정치인은 없다. 단지 문자폭탄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만 있을 뿐”(초선 의원)이라는 것이다.
팬덤 정치의 부작용을 줄이려면 우선 팬덤의 리더 격인 정치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3선 의원은 “팬덤 정치의 문제점을 잠재울 사람은, (현재) 팬덤의 혜택을 보고 있는 이재명 의원과 그 주변 사람들뿐”이라며 “이분들이 ‘이런 방식은 안 된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쳐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민하 시사평론가는 “어떤 정치 세력이든 강성 팬덤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비겁하게 이들에게 편승해서 자기의 안위를 챙기는 정치에 머무르는 정치인”이라며 “(강성 지지층이) 전체 공동체에 필요하지 않은 주장을 할 경우,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책임 있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팬덤 정치의 순기능을 되살리는 방식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정치인과 팬덤이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 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기보다는 민주당의 지지 동력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취지다. 민주당 관계자는 “(팬덤의 등장으로) 민주당 조직이 ‘상향식’으로 바뀌고, 당원이 당의 주축이 되면서 정권교체와 국정운영의 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라며 “상향식 정당으로서 이점은 살리면서, 부작용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우삼 기자 wu32@hani.co.kr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