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2016.8.15.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2016.8.15. 연합뉴스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박근혜 대통령은 칼럼 쓰는 사람들에게는 참 고마우신 분이다. 글감이 없어 허덕이는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기자도 그 덕에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칼럼 차례를 겨우겨우 넘긴 경우가 숱하다. 심지어는 ‘박근혜 대통령은 진짜 효녀일까?’라는 제목으로 숫자까지 붙여가면서 시리즈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듣고서는 새로운 궁금증이 일었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글을 쓰는 기자로서는 다시 없이 편한데, 대통령의 연설문을 써주는 이의 심경은 어떨까? 청와대의 최진웅 연설기록비서관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면 좋으련만 아예 불가능할 터이다. 대신 강원국(54)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김대중 대통령과 3년, 노무현 대통령과 5년, 도합 8년 동안 두 대통령의 글을 쓰고 다듬어 온 사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잘못 언급했다. 뤼순 감옥인데 하얼빈 감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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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연설문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틀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광복절 경축사 같은 중요한 연설의 경우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독회가 10여 차례 열렸다. 그런 독회에는 모든 수석비서관이 참석한다. 독회 전에 수석비서관에게 연설문 초안이 돌고 수석비서관은 다시 같이 일하는 비서관들에게 내려 보내 연설문의 문제점이나 개선안을 내놓으라고 지시한다. 각 수석비서관이 그걸 취합해서 독회에 나와 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연설문을 미리 보는 사람이 수십명이고 그걸 10여 차례 거듭하니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어긋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사고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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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 직전에 다급하게 그 문구를 집어넣은 경우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국군의 날 기념사를 하면서 ‘6·25는 성공하지 못한 통일 시도’라는 말을 해 ‘조중동’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대통령이 직접 연설문에 추가한 문구이고 우리는 연설 직전에야 연설문 완성본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이 손수 넣으신 내용이니 시시비비를 따질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비서진이 검토해보라고 신년 연설문을 내려보냈는데 ‘개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개해는 분명히 새해를 잘못 쓴 걸로 보이는데 일부 비서관이 ‘올해가 개띠해니 개해라고 해도 맞다’고 우기는 거다. 답답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여쭤보니 ‘아이고 내가 잘못 썼네’ 하고 바로 잡아주셨다. 대통령이 말씀하신 ‘개해’니 무조건 수용하고 보자는 심리가 작동한 사례다. 그래도 6·25는 관점의 차이일 뿐 사실의 오류는 아니었다. 개해도 고쳐졌다. 내가 청와대 8년 있는 동안 대통령 연설에서 사실의 오류는 없었다. 그러나 박근혜 청와대에서는 실제로 그런 위험성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8·15 경축사 연설문은 수십명이 10여차례 독회안중근 순국 ‘하얼빈 감옥 오류’는 있을수 없어대통령이 연설 직전 다급하게 문구 삽입 가능성경축사 느낌은 누군가 써준대로 읽고 있는 느낌

-지금 청와대는 옛날 청와대와 어떻게 다르기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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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용어에 ‘무주의 맹시’라는 게 있다. 두 눈 뻔히 뜨고 바라보고 있지만 주의가 다른 곳에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하는 상태다. 권위에 복종할 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대통령이 한 말이라면 의문이 일어도 무조건 흡수해버리는 거다.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커녕 물어볼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거다. 그런 심리로는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잘못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그렇게 폭발했다. 권위적인 정부일수록 그런 현상이 심하다. 오류가 발생해도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에서는 애초에 잘못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를 들었을 텐데 느낌이 어땠나?

“본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냥 써준 대로 읽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불행이다. 말을 들어보면 생각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말 재주, 글 재주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은 생각도 있어야 되고 표현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글과 말로 표현 못하는 경우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있다는 거다. 정리가 안 돼있는 생각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무회의 자리 같은 데서 원고 없이 말씀하시는 것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통역기가 필요하다고들 하지 않나. 평시는 몰라도 위기가 닥치면 위험해진다. 평소에 생각이 정리돼 있지 않은 지도자는 남에게 의존하게 되고 다급하면 허둥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8·15 경축사에 비중을 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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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신년 기자회견과 8·15 경축사 두 번이다. 신년 기자회견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어서 대통령이 마음먹고 말을 하기에는 8·15 경축사가 가장 좋다. 물론 다른 때도 경축사를 하기는 한다. 3·1절, 현충일, 국군의 날 등등. 그런데 그런 기념일은 성격이 분명해서 국정 전반에 걸쳐 포괄적인 얘기를 하기가 자연스럽지 않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부터 김영삼 대통령까지는 8·15 때 주로 대북 제의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 들어서 국정 전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국정을 어떻게 끌어왔고 앞으로 어떻게 끌고 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말했다. 해를 바꿔가며 자주 국방, 친일 청산, 분열의 문제를 8·15 경축사의 의제로 삼았다.”

광복절 경축사는 대통령 국정철학 밝히는 시간DJ, 연설비서관 도움없이 처음부터 직접 집필노 대통령은 구술로 주제 잡은뒤 초집중 준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는 8·15 경축사를 어떻게 준비했나?

“아무리 늦어도 한 두달 전부터 경축사 준비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심지어 연초부터 ‘올해 8·15에는 이런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어’ 하고 시동을 걸었다. 두 분은 자기 생각이 분명하기 때문에 연설비서관이 대통령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주 쓰는 단어, 논리 전개방식 등 고유한 색채를 그대로 살려주길 원했다.”

-두 대통령의 성격이 다르다. 연설문 스타일도 차이가 있을 텐데….

“김대중 대통령은 꼼꼼하고 자상했다. 우리가 연설문 초안을 올리면 여백에 깨알같은 글씨로 국한문 혼용체를 써서 빽빽하게 원고를 고치셨다. 우리 비서관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화이트를 사용하고 문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화살표도 그리셨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다가 복잡해지면 빨간색 볼펜으로 덧쓰시기도 했다. 그런데 1년에 딱 두 번, 광복절 경축사와 국군의날 기념사는 우리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쓰셨다. 우리가 초안을 올리기는 하지만 손도 안 대시고 처음부터 직접 집필을 하셨다. 우리는 나중에 오탈자만 고치는 수준이었다. 8.·15 경축사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신 거다. 국군의날은 왜 그렇게 비중을 뒀는지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다섯 번의 광복절 가운데 마지막 해는 직접 쓰지 않고 우리가 올린 것을 수정하시더라. 자제분들 문제 때문에 당에서 탈당하라 마라 시끄러울 때라 의욕을 잃으신 거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은 100% 구술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불러서 집무실에 올라가면 몇시간이고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불러준다. 우리는 그걸 가지고 와서 글로 풀었다. 대통령은 그 글을 얼른 보고 싶어서 우리를 채근하고는 했다. 대통령이 그렇게 올라온 글을 보면서 다시 생각 나거나 고칠 부분이 있으면 우리를 다시 불러 구술을 했다. 그렇게 여러번 오고가면서 차츰차츰 완성본이 만들어진다. 노 대통령은 8·15 경축사의 경우 말하고 싶은 주제를 3~4개 정도 가지고 고민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각기 다른 주제로 연설문을 3~4개 써본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경축사를 준비했다.”

-몇해 전 <대통령의 글쓰기>란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됐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글쓰기와 관련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강연을 나가곤 한다. <대통령의 글쓰기> 뒤 대우 김우중 회장을 모실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회장님의 글쓰기>를 냈고 올 11월 쯤에는 세 번째 책 <강원국의 글쓰기>를 낼 예정이다. 처음으로 남의 글이 아닌 내 글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웃음)

김의겸 선임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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