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유엔 총회를 계기로 추진되는 한-일 정상회담을 놓고 양국 외교당국이 막판까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모양새다. 양국 외교장관은 핵심 현안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두고 현지 회담을 열었지만, 일본 쪽은 별다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박진 외교장관은 지난 19일 오후(현지시각)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을 만나 취임 뒤 네 번째 양자회담을 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서울에서 한 정례 브리핑에서 “박 장관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서 경청한 목소리와 지난 네 차례에 걸쳐서 이뤄진 민관협의회 등의 계기에 청취한 국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구체적으로 일본 쪽에 전달하고 성의 있는 호응을 촉구했다”며 “일본 쪽도 진지한 태도를 보이면서 심도 있게 의견을 교환했다”고 말했다.
외교부 당국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박 장관은 민관협의회 등을 통해 나온 여러 해법과 피해자 쪽 요구 등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특히 지난 5일 활동을 끝낸 민관협의회에서 정부 예산을 투입해 배상금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터라, 한-일 기업 등 민간 주도로 재원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일본 쪽에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쪽은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가해 전범기업이 사죄하고 배상에 참여하는 것을 ‘최소한의 전제’로 내걸어 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 쪽은 사죄, 배상과 관련해 구체적인 태도를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쪽에선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한국 쪽이 먼저 적절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사히신문> 등은 “하야시 외무상이 윤석열 대통령의 100일 기자회견 등에서 일-한 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인 것을 환영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전하면서도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만큼, “한국 쪽이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외교 장관 회담에서 양쪽 입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한-일 정상회담 성사 여부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양국 장관 회담에서 정상회담 관련 논의가 이뤄졌는지에 관해 “회담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추가로 드릴 말씀이 없다”며 언급을 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8일 출국 전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문제를 포함해 한-일 안보협력, 경제·무역 현안 등을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괄 타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북핵에 대응하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위해서 한-일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교부가 한일 외교장관 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두 장관은 최근 급변하는 국제정세 및 엄중한 한반도 상황 등을 감안해 한-일 및 한-미-일 협력을 지속 강화해 나가자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문제는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낮은 지지율 탓에 국내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과거사 문제는 양국 간 ‘뜨거운 감자’인 탓에, 상대에게 ‘양보’하는 모습으로 비칠 행동은 피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되더라도,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약식 회담이 될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도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