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전 연설기록비서관
김영수 전 연설기록비서관

박근혜 대통령은 제71돌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을 ‘하얼빈 감옥’이라고 잘못 언급했습니다. 연설 뒤 논란이 일자,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대통령 말씀 중 정정할 부분이 있다. ‘차디찬 하얼빈 감옥에서’라고 했는데, 하얼빈이 아니고 뤼순이다”라며 “지적을 하지 마시고,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청와대에서 연설문 작성을 담당했던 인사들은 이번 사안을 놓고 ‘매우 중대한 실수’ 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광복절 경축사는 수많은 대통령 연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연설로 꼽힙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제10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도 실패한 ‘쥐덫’ 사례를 성공 사례로 잘못 설명했습니다. 대통령의 말을 점검하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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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말 한마디 한마디의 파장은 큽니다. 청와대 공보수석을 맡아 김영삼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청와대 입성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당부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말이 국정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국정은 대통령의 말로 이뤄지는 거더라. 그러니까 윤 수석, 연설문 정말 잘 써줘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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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연설문 작성은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실이 담당합니다.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때는 공보수석실이 연설문을 작성했고요. 김대중 정부 때부터 공보수석 밑에 연설비서관이 신설됐고, 노무현 정부 때 공보수석이 홍보수석으로 바뀌고 연설비서관실은 대통령 비서실장 직속으로 독립합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연설비서관실은 연설기록비서관실로 바뀌었습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비롯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연설문을 작성한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이명박 정부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었던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에게 광복절 경축사가 어떤 의미이고, 이번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바람직한지 도움말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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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겨레21> 청와대 연설비서관 3명이 말하는 대통령 연설

윤여준 전 장관
윤여준 전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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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 전 연설비서관(왼쪽)
강원국 전 연설비서관(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를 잘못 언급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전례가 있는 일인가?

=어떻게 그런 실수가 빚어졌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역사적 날짜, 장소, 이름 이런 거 다 확인을 시킨다. 시간에 쫓기며 준비를 한 건지, 큰 실수를 한 거다. 이런 일 때문에 대통령 연설의 권위가 망가진다. (윤여준 전 장관)

=해석이 엇갈리는 사안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대해 잘못 이야기했다는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연설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잘못된 언급은 없었다. 더구나 광복절에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실 관계가 틀린다는 건 이해가 안된다.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실수다. 대통령과 연설비서관 둘이서 쑥덕쑥덕 연설문을 만드는 게 아니다. (내가 청와대 있을 땐) 연설문 점검 회의를 대통령 주재로, 또 비서실장 주재로 여러차례 했다. (강원국 전 비서관)

=책 제목을 잘못 말한 사례는 있지만, 드문 경우다. 대통령의 말은 파장이 크기 때문에 엄격하게 크로스체크를 한다. 중대한 실수다. (김영수 전 비서관)

-광복절 경축사는 왜 가장 중요한 대통령 연설로 꼽히는가? 광복절 경축사 준비는 어떻게 진행됐나?

=광복절은 대한민국이 독립한 날이자 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날이잖나. 남북 민족문제, 대일정책 같이 국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과 관련된 메시지를 내야 하는 연설이다. 공보수석 시절 3월부터 광복절 경축사에서 어떤 주제를 다룰지 고민하고 틈틈이 메모했다. 해마다 광복절 경축사를 놓고 엄청나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윤 전 장관)

=광복절 경축사는 주제 제한이 없어 대통령이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연설이다. 그나마 국민들이 대통령 연설 가운데 관심을 갖는 연설이고, 대통령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많은 연설이다. 이러한 까닭에 광복절 경축사는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대통령이 해야 하는 말, 국민들이 듣고 싶은 말이 적절히 들어가야 뒷말이 없다. 광복절 경축사 준비는 보통 두 달 전부터 시작한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각 부처와 각계 전문가로부터 경축사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의견을 받는 것부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초부터 광복절에 어떤 주제로 소통을 할지 숙고했다. (강 전 비서관)

=한해 연설 가운데 신년 국정연설과 광복절 경축사가 가장 중요하다. 광복절 경축사는 대체로 국정을 어떻게 끌고 갈지 이야기하는 자리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보다 신년 국정연설에 비중을 두는 것 같다. 3·1절 연설이 끝나면 광복절 경축사를 위한 여론 수렴·각 부처 의견 취합을 시작한다. 본격적인 준비는 한달 반 정도 걸린다.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경축사를 통해 무엇을 제시할지 아이디어를 내면 청와대 비서실장·국정 상황실장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그 뒤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한 뒤 초안을 작성한다. 그 뒤 대통령이 초안을 검토해 최종안을 결정했다. (김 전 비서관)

-청와대는 이번 실수에 대해 국민들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번 사안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바람직한가?

=청와대가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므로 대변인이 국민들에게 이러이러해서 실수가 빚어졌다, 면목이 없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내부적으로 연설문 작성 과정에 대한 점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윤 전 장관)

=가장 큰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중간 과정이야 어떻든 사실 여부를 가려내지 못 하고 말을 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거다. 두번째가 시스템이다. 실수를 걸러주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청와대가 이번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단순히 실수한 거 가지고 무슨 문제냐, 그러면 똑같은 실수 반복된다. 실수를 걸러주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외교 무대에서 실수가 나오면 그건 국익에도 영향을 미치니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강 전 비서관)

=뤼순을 하얼빈으로 잘못 말한 건, 대일 메시지 같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의 문제는 아니고 기술적 잘못이라고 본다. 다만, 청와대 대변인이 사실 착오가 있었음을 알리고 내부적으로 관련자들을 모아서 프로세스를 점검해야 한다. (김 전 비서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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