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미국 방송에 출연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북한 핵 무기를 해체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리집 갈무리
북-미 정상회담 성공을 낙관하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북한이 남북고위급회담을 갑자기 연기한 데 이어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로 미국의 대북 압박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북한이 밝힌 입장으로 보아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바라는 기존의 태도가 바뀐 것 같지 않지만, 양쪽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면 상황이 자칫 악화할 수도 있는 국면이다.
북한은 김 부상의 성명 발표에 앞서 16일 열릴 예정이던 남북고위급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이날 새벽 통보했다. 북한은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이유로 들었지만, 진짜 이유는 미국 내부의 대북 압박 움직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성명은 미국 행정부 안에서 ‘선 핵포기, 후 보상’을 뜻하는 ‘리비아 핵폐기 방식’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이 일방적인 핵포기 정책만 강요하려 든다면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생화학무기 완전폐기’ 같은 미국의 의제 확대에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최악의 경우엔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확정해 발표한 뒤에도, 미국 쪽에서는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 발언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미국으로 보내 폐기해야만 대북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며 ‘리비아 방식’을 반복했다. 그러나 북한이 리비아 방식에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이런 발언을 되풀이하는 것은 부적절할뿐더러 회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서는 것에 대해 북한이 “대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한 것도 유념해야 한다. 회담이 성공하려면 핵심 의제에 집중해야지 한없이 의제를 넓혀가면서 상대방이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하는 것은 협상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볼턴을 비롯한 미 행정부 내부의 강경파들의 압박 발언이 계속된다면, 어렵게 만들어진 대화의 판이 흔들릴 수 있다.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와 ‘북한 체제보장’이 맞교환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상황 관리에 문제가 없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우선 북한이 고위급회담 연기 사유로 제시한 ‘맥스선더’ 훈련을 그렇게 대규모로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번 훈련에는 지난해와 달리 미국의 최첨단 에프(F)-22 스텔스 전투기가 8대나 참가했다.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을 북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장거리 폭격기를 훈련에 투입하지 않기로 한 것은 다행스럽다. 북한 매체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를 거론한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태씨는 대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부정하면서 북-미 회담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해왔다.
북한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예정된 회담을 당일 새벽에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대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맥스선더 훈련은 지난 11일에 시작됐는데 이제 와서 이 훈련을 거론하는 것은 애써 쌓은 신뢰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남북관계, 북-미 관계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쌓인 달걀 다루듯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시점이다. 북한의 대미 비난 성명과 고위급회담 연기 통보가 어디까지 영향을 줄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만약 다음주로 예정된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에까지 불똥이 튄다면 그때는 문제가 커진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정부는 상황을 최대한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남북 정상이 핫라인 통화를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